논술자료
[교과서 뒤집어읽기]법정의 ‘무소유(無所有)’
설경.
2008. 3. 10. 22:22
[동아일보]
제몫 이상의 재물 탐하는 사람… 소박한 내몫 키우는 보통사람…
무소유를 정말 배워야 할 이들은 누굴까
○ 들어가기
중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필자들과 종교지도자, 대학교수들에게서 우리는 “현대사회는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며 개탄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물질적 가치에 매몰되어 내면적, 정신적 가치가 망각되는 현실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인간의 내면세계 중에서도 욕망은 더럽고 저급한 것이고 버려야 마땅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접하게 되는가?
하지만 과연 정신적 가치를 향한 열정은 늘 아름다운 것일까? 물질적 가치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더럽기만 한 것일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 중 일부를 읽어보자.
○ 작품 보기
○ 뒤집어 보기
이 작품에서 필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사가 소유에 대한 집착(소유욕) 때문에 평안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한정사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 즉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이었다고. 또 인간사의 비극은 모든 인간의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 인간’의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초래한 것이었다고.
인간은 소위 ‘야만’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문명’을 이루었다. 이를 진보라고 한다면 이 진보는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덕택에 가능했다. 오랜 역사 동안 한시도 쉴 틈 없이 일하고 창조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분투가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찬란한 문명이 가능했겠는가? 이들의 분투와 노력은 순전히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더 풍요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면 그러한 분투와 노력이 이루어졌겠는가? 일하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좀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에 대해 우리 인류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똑같은 논리로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니 세계 곳곳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그 결과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더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욕망이 더러운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사회의 통상적, 정상적 양식으로 보자. 자신의 삶을 충분히 지탱하고도 남을 재물과 권력을 지키고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혈안이 된 욕망이 더럽고 부도덕한 것이다. 그런 욕망은 필연적으로 남의 불행을 전제로 성취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은 남에게 돌아갈 몫을 은근슬쩍 자기의 몫으로 바꿔치기 해야만 채워지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야말로 작금의 극심한 양극화와 비극적 전쟁을 야기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러운 욕망, 부도덕한 욕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깨끗한 욕망, 아름다운 욕망이 존재한다. 이는 제 몫을 아는 욕망이며, 제 몫 이상은 제 몫으로 취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욕망이다. 대체로 이렇게 아름다운 욕망은 건강하게 일하며 세상을 말없이 떠받들어 온 사람들의 것이었다. 결국 일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더욱더 장려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당하고 있다. 지나치게 검소하게, 지나치게 절제하며 살도록 강요받는다. 교과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종교지도자의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식자들의 글을 통하여. 교과서와 지도자와 지식인이 갖는 권위 자체가 얼마나 큰 권력인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사실은 자명해진다. 무소유와 절제, 검소의 미덕으로 감화시켜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이다. 이제 교과서는 건전하고 아름다운 욕망과 추하고 부도덕한 욕망을 구별하여야 한다. 전자는 더욱 키우고 후자는 버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변성관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무소유’ 전문(全文)과 이에 관한 더 자세한 해설은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몫 이상의 재물 탐하는 사람… 소박한 내몫 키우는 보통사람…
무소유를 정말 배워야 할 이들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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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필자들과 종교지도자, 대학교수들에게서 우리는 “현대사회는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며 개탄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물질적 가치에 매몰되어 내면적, 정신적 가치가 망각되는 현실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인간의 내면세계 중에서도 욕망은 더럽고 저급한 것이고 버려야 마땅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접하게 되는가?
하지만 과연 정신적 가치를 향한 열정은 늘 아름다운 것일까? 물질적 가치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더럽기만 한 것일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 중 일부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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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필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사가 소유에 대한 집착(소유욕) 때문에 평안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한정사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 즉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이었다고. 또 인간사의 비극은 모든 인간의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 인간’의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초래한 것이었다고.
인간은 소위 ‘야만’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문명’을 이루었다. 이를 진보라고 한다면 이 진보는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덕택에 가능했다. 오랜 역사 동안 한시도 쉴 틈 없이 일하고 창조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분투가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찬란한 문명이 가능했겠는가? 이들의 분투와 노력은 순전히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더 풍요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면 그러한 분투와 노력이 이루어졌겠는가? 일하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좀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에 대해 우리 인류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똑같은 논리로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니 세계 곳곳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그 결과로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더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욕망이 더러운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사회의 통상적, 정상적 양식으로 보자. 자신의 삶을 충분히 지탱하고도 남을 재물과 권력을 지키고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혈안이 된 욕망이 더럽고 부도덕한 것이다. 그런 욕망은 필연적으로 남의 불행을 전제로 성취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은 남에게 돌아갈 몫을 은근슬쩍 자기의 몫으로 바꿔치기 해야만 채워지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이야말로 작금의 극심한 양극화와 비극적 전쟁을 야기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러운 욕망, 부도덕한 욕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깨끗한 욕망, 아름다운 욕망이 존재한다. 이는 제 몫을 아는 욕망이며, 제 몫 이상은 제 몫으로 취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욕망이다. 대체로 이렇게 아름다운 욕망은 건강하게 일하며 세상을 말없이 떠받들어 온 사람들의 것이었다. 결국 일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더욱더 장려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당하고 있다. 지나치게 검소하게, 지나치게 절제하며 살도록 강요받는다. 교과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종교지도자의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식자들의 글을 통하여. 교과서와 지도자와 지식인이 갖는 권위 자체가 얼마나 큰 권력인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사실은 자명해진다. 무소유와 절제, 검소의 미덕으로 감화시켜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이다. 이제 교과서는 건전하고 아름다운 욕망과 추하고 부도덕한 욕망을 구별하여야 한다. 전자는 더욱 키우고 후자는 버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변성관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무소유’ 전문(全文)과 이에 관한 더 자세한 해설은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