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경제광장] 내 마음속의 탈레반

설경. 2008. 3. 13. 16:43

김성호 칼럼니스트



적은 토지보상금 앙심



‘분풀이’숭례문 방화



탈레반과 맞먹는 테러



‘물신 숭배사회’부작용



우리는 숭례문이 전소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채모 씨라는 노인이 왜 그곳에 불을 질렀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국보 1호를 불질러 없앤 방화범의 이름 석 자가 채종기라는 사실도 범인이 체포되고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그 전까지 그는 그저 ‘70세 채모 씨’였다. 그의 얼굴이나 생김새도 운동모와 마스크에 깊숙이 가려진 채 아직까지 신비에 쌓여 있다.

다른 때 같으면 공분에서 비롯된 응징적 심층취재에 나설 언론과 미디어들도 이번만큼은 그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미진하고 서운한 느낌은 온 국민의 가슴속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 애석과 분노의 감정이 아직도 석연히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같은 반역사적 반사회적 중대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주위의 질책으로부터 오랫동안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건 제2, 제3의 유사 범죄에 대한 초대장을 발급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지난 2월 10일 밤부터 시작돼 거의 보름 동안 TV에서 온종일 반복 방영되다시피 한 숭례문 화재 광경은 두 가지 과거사를 연상시킨다. 2층 누각에서 불기운에 못 이겨 건물 잔해가 쏟아져내리는 광경은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의 붕괴 장면과 흡사하다. 또 숭례문이 민족적 문화유산이자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파괴적 공격은 2003년 3월 2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바미얀 석불 포격을 연상시킨다.

숭례문 방화나 9.11 테러 그리고 탈레반 석불 포격은 동기는 달라도 모두 야만적 테러의 결과다. 특히 숭례문 테러는 알카에다나 탈레반처럼 이념 집착에 따른 국가 폭력이 아니고 개인의 특별한 원한이 그 배경이 됐다는 데서 더 위험하다. 사회나 이웃에 대한 개인적 불만 또는 원한이 동기라면 우리 모두가 잠재적 테러리스트 아닌가. 그 숫자는 테러를 일삼는 국가나 정치집단 또는 범죄조직보다 훨씬 많다.

채종기라는 한 개인으로 하여금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맞먹는(적어도 한국인에겐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테러를 저지르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론 어처구니없게도 토지 보상금이 적은 데 대한 앙심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개발계획 또는 재개발.재건축 등으로 원래의 땅 임자에게 지급된 토지 보상금이 30조원이나 된다는데 나에게 돌아온 보상금은 고작 9800만원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채 씨의 심경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사람보다 물질, 특히 상품이나 돈을 숭배하는 풍조를 물신(物神)숭배라고 한다면 한국인의 최신판 물신은 토지와 가옥이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소유하고 증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 증거를 들자면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바로 요즘 고위 공직자의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재산 목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인 가운데 몇몇 용감한 사람은 이 두 물신의 존경심에는 40%의 거품이 끼었으니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지와 가옥은 여전히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는 그들의 노예다. 거품 제거는 물신의 권위와 공경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내가 모시는 물신이 헐값에 팔렸다고 생각하고 복수에 나선 방화범 채종기는 이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걱정되는 것은 아직도 전국 건축 문화재의 대부분이 방화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을 계기로 각종 문화재에 대한 허술한 보안과 소방 방재 체제가 질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하는 금언은 예나 지금이나 진실이다. 내가 섬기는 물신이 천대받는다면 언제나 복수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우리 주변엔 널려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의 국민들이 삶의 만족도 조사에선 세계 하위권을 맴돈다. 그게 요즘의 한국인들이다. 분풀이의 대상이 어찌 문화재뿐이겠는가. 우리의 공공.사유재산, 우리의 가정과 목숨이 모두 물신 숭배의 공포 앞에 떨고 있다. 그래서 채종기는 떳떳하게 말한다. “건물에 불만 냈지 그래도 사람은 죽이지 않았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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