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배명복시시각각] 잊혀진 전쟁, 잊고 싶은 전쟁
설경.
2008. 3. 2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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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무엇을 할 거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얼마 전 한 말이다. 임기를 10개월 남짓 남겨두고, 심신이 몹시 고단한 모양이다.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며칠 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紙) 독자투고란(3월 17일자)에 이런 글이 실렸다. 캘리포니아 멘로 파크에 사는 독자가 보낸 글인데, 부시 행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가구당 평균 600달러씩 총 1500억 달러를 방출한 데 대한 소감이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지? 월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면 몽땅 중국으로 갈 테니 안 되겠고, 그럼 컴퓨터를 사? 아냐, 그러면 대부분 한국 아니면 인도로 가겠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면 중동으로 다 갈 거고. 미국 경제에는 하나도 보탬이 안 돼. 그럼 어떻게 하지? 맥주를 사든가,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하든가, 아니면 성(性) 매수를 하는 수밖에 없겠군. 젠장.”
댓글이 붙었다면 이런 댓글도 있지 않았을까. ‘맥주를 사더라도 잘 골라서 사고, 사람을 사더라도 잘 가려서 사야 할 걸요. 아마’. 이 독자는 사실 공연한 걱정을 한 꼴이 됐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은행 빚이나 카드 빚을 갚는 데 그 돈을 썼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인한 유동성 위기에서 금융회사들을 구하는 데 쓴 셈이다.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려 해도 국내에 남아 있는 제조업이 별로 없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는 금융산업은 점점 더 깊은 부실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부도 위기에 몰린 은행을 살리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모럴 해저드’란 비판을 감수해 가며 이례적으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물가를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금리 수준까지 이자율을 계속 낮추고 있지만 미국 경제의 위기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열심히 불을 꺼보지만 언제 어디서 다시 불길이 솟을지 알 수 없는 형국이다.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위기’는 예삿말이 됐고, 대공황의 전조라는 끔찍한 진단까지 나왔다. 총체적 파국으로 가는 12단계 중 10단계까지 왔다는 것이다. 느긋하기로 소문난 부시 대통령인들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까.
그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오늘로 개전 5주년을 맞은 이라크 전쟁이다. ‘바그다드 진군’을 외치던 때의 기세등등한 호기는 간 데 없고, 이라크 전쟁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실패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쌓이는 청구서와 기나긴 희생자 명단뿐이다. 약 4000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고, 2만9000명이 부상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수도 9만 명에 달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미국은 8450억 달러를 전비로 지출했다. 간접비용까지 합하면 3조 달러에 이른다. 무익한 전쟁에 천문학적 재원을 탕진하고도 경제가 제대로 굴러간다면 그게 되레 이상한 일 아닐까.
그래서일까. 미국인들에게 이라크전은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 퓨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이라크전은 지난해 상반기 중 5주일을 제외하고는 대중이 가장 주시하는 뉴스 1위였으나 가을부터 갑자기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더니한 번도 1위에 오르지 못했다. 올 1월의 경우 응답자의 36%가 가장 주시하는 뉴스로 대선을 꼽은 반면 이라크전은 6%에 불과했다.
일부 미국인의 예상대로 부시가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란 오명의 주인공이 된다면 첫 번째 이유는 이라크전일 수밖에 없다. 초강대국의 힘과 권위를 믿고, 국제 여론을 무시한 채 무모하게 전쟁에 뛰어든 대가가 너무나 크다. 그에게 이라크전은 어서 빨리 크로퍼드 목장으로 돌아가 ‘잊고 싶은 전쟁’이 되었겠지만 남겨진 상처와 무너진 경제는 어찌할 것인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