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목화 스파이' 문익점? 그는 단지 '농림가'였다

설경. 2008. 3. 27. 08:37
백성의 富 꿈꿨던 '문익점' 붓 두껍에 목화씨 숨겨 온 기록 없어 강남 유배설, 후손이 만들어낸 이야기

목화(木花)는 두 번 꽃이 핀다. 본래 꽃이 피었다 지면, 익어 벌어진 열매에서 또 한 번 꽃이 핀다. 눈꽃처럼 하얀 솜꽃이다. 그렇게 피어난 솜은 따뜻한 옷이 되고, 푹신한 솜이불이 된다. 또 코피를 틀어막거나 상처를 다스릴 때 쓰는 의료용 탈지면이 되기도 한다. 목화는 원산지가 인도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열대와 온대지방 곳곳에 전래되어 재배되고 있으며 그 품종도 다양하다.

↑ 박남일 자유기고가

익히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목화를 들여온 사람은 고려 말 문인 문익점이었다. 1329년에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문익점은 공민왕 때인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됐고, 1363년에는 좌정언(左正言)에 올랐다. 그해 서장관(書狀官, 외교사절단 중 기록을 담당하는 사람)이 돼 원나라에 갔는데, 원나라 황제에게 밉보여 중국 강남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중 길가에서 목화씨 여남은 개를 따서 붓대에 숨겨왔다고 한다. 당시 목화는 원나라에서 반출을 금지하는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산업스파이' 문익점은, 그렇게 밀반입한 목화씨를 가지고 이듬해인 1364년에 진주에 내려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심어 기르게 했다. 열 개 가운데 오직 씨앗 하나만 싹이 터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그렇게 심고 거두기를 몇 년 간 되풀이하여 마을 사람들이 두루 재배하게 됐다. 그런데 목화 보급에는 성공하였지만 솜에서 실을 뽑고, 또 그것으로 베를 짜는 기술을 알 수 없었다. 이때 해결사가 나타났다. 원나라 승려 홍원(弘願)이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하얀 목화밭을 본 홍원은 정천익의 집에 머물며 실 뽑고 베 짜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몇 해 만에 그 기술은 널리 보급됐다. 나중에 문익점은 공로를 인정 받아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됐고, 뒤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몇 가지 논란거리가 있다. 먼저 '붓대' 이야기다. 공식적인 역사기록 어디에도 '붓 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왔다는 말은 없다. 사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그냥 얻어왔다고 한다. 논란거리는 또 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1363년 봄에 원나라에 갔다가 그 해 가을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에 진주에 내려왔다. 기간을 따져보면 강남에서 귀양살이 했다는 그 3년은 정체불명의 시간이다. 무언가 석연찮다. 왜 이런 논란거리가 생기게 된 것일까?

문제는 당시의 권력투쟁에서 비롯한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간 무렵에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에 원나라 순제는, 충선왕의 아들로 원나라에 와 있던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 한 나라에 두 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공민왕은 사절단을 보내 해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원나라 황제는 매번 사절단을 억류했다. 하필이면 그럴 때 문익점이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는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문익점은 원나라에 가서 신임 왕 덕흥군 쪽에 가담하였다가 덕흥군쪽이 패하자 1364년에 목화 종자를 얻어가지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익점의 후손들이 1819년에 간행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에 따르면 문익점이 "백성에게 두 군주가 있을 수 없다"며 원제와 덕흥군 쪽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그러자 원나라 순제는 문익점을 강남으로 유배 보냈고, 거기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하여 1367년에 귀국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록이 다른 것은 서술의도의 차이 때문이다. 문익점이 귀국 후 파직을 당했다가 다시 등용된 것을 보면, 덕흥군과 관련된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뒤인 1389년. 조선 창업 세력이 전제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때 문익점은 보수파의 좌장 격인 이색 등과 더불어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의 창업자들은 결국 '고려사'에서 문익점의 행적을 깎아 내리게 된다. 그러자 후손들은 문익점의 명예회복에 집착하여 충신의 이미지를 애써 덧씌웠다. 강남 유배설이나 '붓대의 일화'는 리얼리티를 위한 장치인 것이다.

문익점은 부국(富國)을 추구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 때나 조선혁명기에도 뚜렷한 정치색을 띄지 않았다. 그는 단지 위대한 '농림가'였고, 백성의 생활에 질적 변화를 꿈꾼 부민(富民)주의자였다. 소용돌이치는 정국에서 시달림을 받으며 그는 백성이 부유한 세상을 꿈꾸었다. 그런 마당에 문익점을 중세시대의 '산업스파이'로 몰아가는 것은 진지한 역사를 액션 영화 화면에 가두는 일일 것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 ☞ 모바일 조선일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