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고교생을 위한 철학카페] 맹자 '사양지심'
설경.
2008. 4. 10. 17:21
주어진 몫 충분하다면 남에게 베푸는 미덕 필요
어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치려고 질문을 던졌다.
"어린이 여러분, 어른들이 과자나 선물 같은 것을 주시면 다섯 글자로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들은 우리의 어린이들, 고사리 같은 손을 번쩍 번쩍 들고 참새 새끼들 마냥 입을 쩍쩍 벌리면서 답했다.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쪽 구석에서 우리의 삐딱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대단한 진리라도 알아챈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선 이렇게 답했단다.
"뭘 이런 걸 다…."
맹자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비웃기라도 하듯, 위의 일화는 분명 웃자고 만들어 놓은 말이다. 본디 '사양지심'이란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다. 물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을 사양하라는 것은 아니다. 즉 무엇이건 받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는 아니라는 말이다. 맹자가 의도하는 바대로의 '사양함'이란 배부른 아이의 고갯짓에서 볼 수 있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배를 한껏 채운 돌잡이 아이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젖을 물릴 수가 없다.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기어코 사양하고야 말기 때문에.
따라서 맹자의 '사양지심'을 이리저리 곱씹어보면 무언가 선결돼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 충분히 충족돼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필요가 충족돼야 자연스럽게 사양하게 된다. 혹여 이들의 식성을 과식, 즉 욕심껏 먹는 것이라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갓난아이들은 과식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 없다.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들에겐 필요한 것이 충분한 것이며, 충분한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들의 사양도 그러한 필요가 충족됐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충족'이란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아니 말조차 어렵다.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도대체 나에게 충분한 것, 바꿔 말해서 꼭 필요한 것이 어느 정도란 말인가. 한 개인이 먹는 양에 대해서조차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비만이라는 강력한 생리적 질병은 고도로 발달한 의료사회에 사는 우리를 한껏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식욕조차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사양지심'을 마땅한 것이라고 말하기란 매우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맹자가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마지막 단서로 내 건 것은 아마도 이런 문제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마음은 적당한 것과 적당하지 않은 것, 충분한 것과 충분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시비지심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사양지심 또한 허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가 스스로 충분하다는 것과 더 먹는 것이 스스로에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으므로 더 이상 먹지 않겠다는 표현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분별지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미 문명화된 사회에서 '사양지심'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어린아이들은 마치 짐승과 같은 존재 아닌가. 우리가 짐승과는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연적으로 느끼는 만족감을 인간다움의 근거로 판단한다는 것은 너무 편향적인 사고가 아닐까.
이 글에서 사양하는 마음과 시비를 분별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논의는 사실, 자유로운 의지를 인간다움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세우는 현대적 흐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를 당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이것저것 복잡하고 지저분한 사건 사고로 신문이 복잡한 세상에서 매우 유용한 것일 수는 있다. 따라서 시비지심이 우리의 본성에 들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보다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어도 시비를 분별하고자 노력하는 자세와 자기에게 차고 넘치는 것을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보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아닐까. 그래야 우리가 짐승과는 다른 인간일 수 있다.
온 세상이 국회의원 선거로 시끄러웠다. 이미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졌다. 한 동안은 승리와 실패의 요인을 따지느라 또 시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승리의 기쁨이나 실패의 아쉬움이어서는 안 된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각 당의 공천과정에서도 그렇거니와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이번 선거와 관련된 분들 중 많은 분들의 얼굴이 "뭘 이런 걸 다"라고 말하는 '삐딱이'의 얼굴과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이제 앞으로 많은 날 동안 이 사회는 그 분들로 인해 또한 많은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 분들이 선거의 승자로 만족하는 모습보다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뇌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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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치려고 질문을 던졌다.
"어린이 여러분, 어른들이 과자나 선물 같은 것을 주시면 다섯 글자로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들은 우리의 어린이들, 고사리 같은 손을 번쩍 번쩍 들고 참새 새끼들 마냥 입을 쩍쩍 벌리면서 답했다.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쪽 구석에서 우리의 삐딱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대단한 진리라도 알아챈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선 이렇게 답했단다.
"뭘 이런 걸 다…."
↑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조선일보 DB
따라서 맹자의 '사양지심'을 이리저리 곱씹어보면 무언가 선결돼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 충분히 충족돼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필요가 충족돼야 자연스럽게 사양하게 된다. 혹여 이들의 식성을 과식, 즉 욕심껏 먹는 것이라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갓난아이들은 과식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 없다.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들에겐 필요한 것이 충분한 것이며, 충분한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들의 사양도 그러한 필요가 충족됐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충족'이란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아니 말조차 어렵다.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도대체 나에게 충분한 것, 바꿔 말해서 꼭 필요한 것이 어느 정도란 말인가. 한 개인이 먹는 양에 대해서조차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비만이라는 강력한 생리적 질병은 고도로 발달한 의료사회에 사는 우리를 한껏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식욕조차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사양지심'을 마땅한 것이라고 말하기란 매우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맹자가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마지막 단서로 내 건 것은 아마도 이런 문제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마음은 적당한 것과 적당하지 않은 것, 충분한 것과 충분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시비지심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사양지심 또한 허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가 스스로 충분하다는 것과 더 먹는 것이 스스로에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으므로 더 이상 먹지 않겠다는 표현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분별지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미 문명화된 사회에서 '사양지심'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어린아이들은 마치 짐승과 같은 존재 아닌가. 우리가 짐승과는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연적으로 느끼는 만족감을 인간다움의 근거로 판단한다는 것은 너무 편향적인 사고가 아닐까.
이 글에서 사양하는 마음과 시비를 분별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논의는 사실, 자유로운 의지를 인간다움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세우는 현대적 흐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를 당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이것저것 복잡하고 지저분한 사건 사고로 신문이 복잡한 세상에서 매우 유용한 것일 수는 있다. 따라서 시비지심이 우리의 본성에 들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보다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어도 시비를 분별하고자 노력하는 자세와 자기에게 차고 넘치는 것을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보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아닐까. 그래야 우리가 짐승과는 다른 인간일 수 있다.
온 세상이 국회의원 선거로 시끄러웠다. 이미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졌다. 한 동안은 승리와 실패의 요인을 따지느라 또 시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승리의 기쁨이나 실패의 아쉬움이어서는 안 된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각 당의 공천과정에서도 그렇거니와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이번 선거와 관련된 분들 중 많은 분들의 얼굴이 "뭘 이런 걸 다"라고 말하는 '삐딱이'의 얼굴과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이제 앞으로 많은 날 동안 이 사회는 그 분들로 인해 또한 많은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 분들이 선거의 승자로 만족하는 모습보다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뇌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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