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뉴스
학생은 속타고, 교수는 목타고 ● 영어로 수업 진행하는 대학 강의실
설경.
2008. 4. 14. 16:53
학생은 속타고, 교수는 목타고 ● 영어로 수업 진행하는 대학 강의실
지난 8일 고려대 교양관 201호 강의실. 사학과 전공 과목인 '한국사회운동사'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어로 수업하는 강의다. 영세농민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설명하던 강사가 영어로 " 중국 과 베트남 의 혁명은 누가 주도했나?"라고 질문하자, 학생 19명 전원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강사의 시선을 외면했다.
강사가 한 학생을 지목하자, 해당 학생은 당황하며 한국말로 "사회주의자 아닌가요?"라고 답했다. 영어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교실엔 침묵이 흘렀다. 강의 중간에 "그러면 한국어로 이 대목을 말해 볼 사람?"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나왔다. "내 말 알아 듣겠어요?"라는 영어 질문은 수업 내내 반복됐다.
◆영어강의는 '대학 국제화' 잣대
최근 주요 대학에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강좌가 크게 늘었다. 올해 1학기 주요 대학들이 개설한 영어 강좌 수와 비율은 고려대 1186개(33.76%), 서강대 199개(17.92%), 서울대 592개(12.4%), 성균관대 371개(15.7%), 연세대 668개(27.02%), 한양대 498개(18.3%)였다.
지난해 1학기 영어 강좌 수가 고려대 1079개(31.86%), 서강대 149개(7.7%), 서울대 93개(3.03%), 성균관대 150개(6.85%), 연세대 327개(14.67%), 한양대 109개(4.27%)였던 것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대학들이 앞다퉈 영어 강의를 개설하는 이유는 각종 대학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다. 영어 강좌의 수가 대학 '국제화' 수준을 측정하는 잣대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대학마다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다양한 인센티브를 부여해 영어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서울대는 교수가 3학점짜리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면 4학점을 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 매 학기 서울대 교수의 의무 강의 학점 수는 12학점(3학점 4강좌)이지만, 영어로 수업할 경우 3과목만 해도 12학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또 상당수 사립대에선 영어 강의를 하는 교수에게 금전적인 혜택을 주는 식으로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강의실의 낯선 풍경
하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실 풍경은 실제 어떨까. 영어 강의를 하는 연세대 경영학과 전공 과목인 '마케팅 전략' 강의실에 기자들이 직접 들어가봤다. 교수는 강의 내용을 영어로 정리해 칠판 앞에 걸어둔 채 수업을 시작했다.
"마케팅에서 '포지셔닝(posi tioning)'이 뭐라고 했죠?" 교수의 영어 질문에 40여명이 자리를 메운 강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교재로 시선을 떨궜고, 책상 밑으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학생도 있었다.
한참 침묵 뒤에 앞자리에 앉은 학생 하나가 영어로 대답을 한 후에야 강의가 이어졌다. 영어가 유창한 학생 2~3명이 답변을 전담하고, 나머지는 칠판 베끼기에 바빴다. 교수는 수업 내내 영어로 "다들 따라오고 있죠?" "질문 없나요?" "내 말 이해한 거죠?"를 연발했다.
같은 날 성균관대의 '현대세계와 글로벌 시각' 수업. 교수는 영어 교재를 읽고 한국어로 해석할 뿐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강의를 빨리 마치고 영화를 보겠어요" "교실 불 좀 꺼 줄래요?" 같은 말만 영어로 했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말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강의
서울대 학생 전용 포털사이트엔 "학생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어느새 영어 수업이 한국어 수업으로 변하더라"는 글이 올라 있다. 중·하위권 및 지방 대학에선 상황이 더 심각하다.
외국인 교수가 수업을 맡았던 지방 D대학 경영학과에선 학생들이 과제물을 단체로 내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교수가 확인해보니, "○○일까지 과제물을 제출하라"고 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한 지방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학교측이 모든 과에서 매년 2과목씩 의무적으로 영어 강의를 개설하도록 해서 어쩔 수 없이 영어 강좌는 만들지만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결국 영어 교재를 읽고 해석해주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물론 모든 영어 강의가 이렇게 캄캄하지는 않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그런대로 영어강의가 잘 이루어진다. 11일 이화여대 화학과 영어 수업인 '유기 합성' 강의에선 교수가 칠판 앞 전자스크린 위에 뜬 유기 화합물 모형과 분자식을 전자빔으로 하나씩 비춰가며 영어로 설명했다. '응축 반응' '가역 반응' 등 전문용어가 생소했지만, 화학식을 보고 푸는 수업이라 학생들은 용어에 익숙해지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영어냐, 지식이냐
대학이 '국제화 시대' 흐름을 좇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학생들에게 우리말로 충실하게 강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옳은가.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서울대 글로벌 MBA' 강의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경영학과 송재용 교수는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를 할 경우, 학생들의 이해 수준은 한국어 강의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지식 전달'이냐 '영어'냐를 두고 늘 갈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공 수업 대부분을 영어로 강의하는 KAIST 의 메리 캐서린 톰슨(여·29) 건설 및 환경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영어 수업에 익숙해지는 데 2개월 정도 걸렸지만 그 후엔 놀랄 만큼 실력이 늘었다"며 "학생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하는 만큼 영어 수업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영어강의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 ]
[김경은 기자 eu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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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고려대 교양관 201호 강의실. 사학과 전공 과목인 '한국사회운동사'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어로 수업하는 강의다. 영세농민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설명하던 강사가 영어로 " 중국 과 베트남 의 혁명은 누가 주도했나?"라고 질문하자, 학생 19명 전원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강사의 시선을 외면했다.
↑ 10일 연세대학교 경영대 본관 한 강의실에서 영어로 진행된‘미시경제학’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교수가 칠판에 적으며 설명하는 내용을 노트에 적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영어강의는 '대학 국제화' 잣대
최근 주요 대학에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강좌가 크게 늘었다. 올해 1학기 주요 대학들이 개설한 영어 강좌 수와 비율은 고려대 1186개(33.76%), 서강대 199개(17.92%), 서울대 592개(12.4%), 성균관대 371개(15.7%), 연세대 668개(27.02%), 한양대 498개(18.3%)였다.
지난해 1학기 영어 강좌 수가 고려대 1079개(31.86%), 서강대 149개(7.7%), 서울대 93개(3.03%), 성균관대 150개(6.85%), 연세대 327개(14.67%), 한양대 109개(4.27%)였던 것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대학들이 앞다퉈 영어 강의를 개설하는 이유는 각종 대학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다. 영어 강좌의 수가 대학 '국제화' 수준을 측정하는 잣대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대학마다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다양한 인센티브를 부여해 영어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서울대는 교수가 3학점짜리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면 4학점을 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 매 학기 서울대 교수의 의무 강의 학점 수는 12학점(3학점 4강좌)이지만, 영어로 수업할 경우 3과목만 해도 12학점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또 상당수 사립대에선 영어 강의를 하는 교수에게 금전적인 혜택을 주는 식으로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강의실의 낯선 풍경
하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실 풍경은 실제 어떨까. 영어 강의를 하는 연세대 경영학과 전공 과목인 '마케팅 전략' 강의실에 기자들이 직접 들어가봤다. 교수는 강의 내용을 영어로 정리해 칠판 앞에 걸어둔 채 수업을 시작했다.
"마케팅에서 '포지셔닝(posi tioning)'이 뭐라고 했죠?" 교수의 영어 질문에 40여명이 자리를 메운 강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교재로 시선을 떨궜고, 책상 밑으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학생도 있었다.
한참 침묵 뒤에 앞자리에 앉은 학생 하나가 영어로 대답을 한 후에야 강의가 이어졌다. 영어가 유창한 학생 2~3명이 답변을 전담하고, 나머지는 칠판 베끼기에 바빴다. 교수는 수업 내내 영어로 "다들 따라오고 있죠?" "질문 없나요?" "내 말 이해한 거죠?"를 연발했다.
같은 날 성균관대의 '현대세계와 글로벌 시각' 수업. 교수는 영어 교재를 읽고 한국어로 해석할 뿐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강의를 빨리 마치고 영화를 보겠어요" "교실 불 좀 꺼 줄래요?" 같은 말만 영어로 했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말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강의
서울대 학생 전용 포털사이트엔 "학생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어느새 영어 수업이 한국어 수업으로 변하더라"는 글이 올라 있다. 중·하위권 및 지방 대학에선 상황이 더 심각하다.
외국인 교수가 수업을 맡았던 지방 D대학 경영학과에선 학생들이 과제물을 단체로 내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교수가 확인해보니, "○○일까지 과제물을 제출하라"고 한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한 지방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학교측이 모든 과에서 매년 2과목씩 의무적으로 영어 강의를 개설하도록 해서 어쩔 수 없이 영어 강좌는 만들지만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결국 영어 교재를 읽고 해석해주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물론 모든 영어 강의가 이렇게 캄캄하지는 않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그런대로 영어강의가 잘 이루어진다. 11일 이화여대 화학과 영어 수업인 '유기 합성' 강의에선 교수가 칠판 앞 전자스크린 위에 뜬 유기 화합물 모형과 분자식을 전자빔으로 하나씩 비춰가며 영어로 설명했다. '응축 반응' '가역 반응' 등 전문용어가 생소했지만, 화학식을 보고 푸는 수업이라 학생들은 용어에 익숙해지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영어냐, 지식이냐
대학이 '국제화 시대' 흐름을 좇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학생들에게 우리말로 충실하게 강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옳은가.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서울대 글로벌 MBA' 강의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경영학과 송재용 교수는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를 할 경우, 학생들의 이해 수준은 한국어 강의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지식 전달'이냐 '영어'냐를 두고 늘 갈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공 수업 대부분을 영어로 강의하는 KAIST 의 메리 캐서린 톰슨(여·29) 건설 및 환경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영어 수업에 익숙해지는 데 2개월 정도 걸렸지만 그 후엔 놀랄 만큼 실력이 늘었다"며 "학생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하는 만큼 영어 수업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영어강의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 ]
[김경은 기자 eu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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