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북벌 논쟁' 최영과 이자송

설경. 2008. 4. 17. 14:59
목숨 내건 용기가 세상을 움직인다

↑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우리 역사에서는 여러 차례 북벌(北伐)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실제 군사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논쟁'에 그치고 말았다. 다만 고려 말에 최영이 불을 지핀 '요동(遼東)정벌' 만큼은 실제로 대군이 편성돼 위화도까지 진군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1388년 정월에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 부패세력에 대한 칼날을 뽑아 들었다. 십 년 넘게 권력을 누리던 이인임이 늙고 병들어 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을 무렵이었다. 최영은 며칠 만에 임견미, 염흥방 등 이인임 일파를 쓸어버렸다. 그런 다음 최영과 이성계는 당시 고려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1388년 2월. 최영은 이성계에게 북쪽으로 대군을 일으키자고 슬쩍 제안한다. 한마디로 명나라와 '맞장'을 뜨자는 것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머뭇거린다. 그럴 때 조정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명나라의 요동도사가 압록강에 이르러, 본래 원나라 땅인 철령 이북을 명에서 접수하겠다는 내용의 방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곳은 30년 전, 공민왕 대에 이미 수복한 고려 땅이었다.

이에 최영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계를 비롯한 신료들 대부분은 속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최영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반대의사를 드러내지 못했다. 이때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펼친 사람이 바로 공산부원군 이자송(李子松, ?~1388)이었다.

"원이 물러간 후, 명은 이미 그 힘을 모두 승계 했사옵니다. 우리 힘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함부로 싸울 수 있으오리까. 원은 쇠락해 쫓겨나고 있지만, 명은 새로 일어서는 나라이옵니다. 그들이 군비를 단단히 하고 대병을 몰아 내려오면 누가 이를 감당하오리이까?"

이자송의 반대의견에 최영이 재반론을 폈다.
"지금 요동지역은 텅텅 비어 곧장 진격하면 상당한 실리를 거두게 될 것이오.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법. 우리도 대륙을 도모해 국토를 넓히고 병사를 새로 뽑아 훈련하고 방비하면 명의 위협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조정에서는 명에 사신을 보내 해결책을 모색키로 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입국을 거부당했다. 다시 밀직제학 박의중을 주청사로 보냈다. 그런데 박의중이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동북면 책임자 최원지로부터 다시 급보가 날아들었다. 명이 요동에 철령위를 세우고, 요동에서 철령 사이에 칠십 개의 역참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왕과 최영은 당장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에 병력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직 이자송 혼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자송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포박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왕명을 거역한 역모죄로 유배됐다. 그리고 곧 유배지에서 죽음의 약사발을 들이켰다. 이자송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성계 측은 '4불가론' 등의 논거를 제시하며 최영의 북벌 계획에 제동을 거는 시늉을 했다. 이자송의 용기가 새삼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편, 명나라 측 역사기록을 보면, 당시 명나라가 정한 철령위 관리구역은 요양성 동북쪽 '봉집현'이었다. 그처럼 먼 곳에서 고려 땅을 다스리려 했다는 게 이상하다. 게다가 당시 주청사 박의중이 명의 철령위 주장을 모두 철회시키고 돌아온 점을 감안하면, 최영의 심복이었던 최원지의 보고는 왠지 날조된 느낌이 짙다. 사실 명에서 철령위 이북을 접수하겠다고 한 것은 외교적인 엄포였다. 요동정벌의 꿈에 부푼 최영이 단지 그것을 거병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에 앞서 이인임 일파에 대한 숙청도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최영은 그렇게 한 후 불과 3개월 뒤에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북벌을 향한 최영의 욕망은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물거품이 됐다. 오히려 그것은 부메랑이 돼 고려와 최영 자신의 목숨을 재촉했다. 애초에 최영이 이자송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후 역사는 달라졌을 터다. 모두들 실권자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힌 이자송은 불운한 정객이었다. 공민왕 대에 원나라에 있던 그는, 원에서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해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우왕 때는 고위 벼슬을 지냈으나, 왕의 방탕한 생활을 간(諫)하다가 파직됐다. 그러다가 최영의 북벌계획을 반대해 결국 목숨을 잃고 만 이자송.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논쟁에는 목숨을 내거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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