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조선 창업의 주인공, 정도전

설경. 2008. 4. 24. 12:49
명나라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경영' 꿈꾸다

1988년. '글로벌 경영'을 외치는 최영의 명에 따라 요동으로 진군하던 이성계는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서 '유턴(U-Turn)'을 하고 말았다.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 중대한 결정 때문에, 이성계와 정도전 등 창업 세력은 한때 사대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위화도에서 회군한 지 10년쯤 지났을 무렵, 이성계와 정도전은 전시 동원 체제를 조성하면서 요동정벌을 준비했다. '소국으로 대국을 칠 수 없다'며, 최영의 북벌론을 그토록 반대하던 이성계는 왜 10년 만에 변심을 한 것일까?

사병혁파로 조선 왕실 주변이 술렁거리던 1397년 여름. 정도전과 남은 등이 요동을 정벌하려 한다는 소문이 조선에 떠돌았다. 그해 6월 14일자 '태조실록'은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갈 것을 태조에게 건의했다'고 전한다. 이에 때마침 병을 앓아 집에서 쉬고 있던 좌정승 조준이 그 말을 듣고 즉시 대궐에 가서 반대 주장을 폈다.

"새로 개국한 나라에서 경솔하게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천조(天朝, 명나라 조정)가 튼튼해 도모할 만한 틈도 없거니와, 거사해도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실록에 따르면, 조준의 반전론에 태조가 기뻐했다고 한다. 태조는 요동공략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오직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를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준의 반대가 있은 직후인 1397년 7월 2일에 태조는 정도전과 남은에게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한다. 거병을 싫어했다는 태조가 북벌론자로 지목된 정도전과 남은에게 의미심장한 선물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또 1398년 8월 9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임금에게 날마다 요동정벌을 권하던 정도전이 요동 공략에 대해 다시 조준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했다. 더불어 이들이 무리하게 군사훈련을 강행하는 바람에 병사들의 볼기짝 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모두가 반대하는 요동정벌을 유독 정도전과 남은이 독불장군처럼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벌론자인 남은 또한 병법 훈련을 게을리 해 태조로부터 질책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것은 당시 전시 동원 체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태조 이성계 자신이었음을 보여 주는 단면일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현비를 저 세상에 보낸 뒤에 잦은 병치레를 하던 태조 이성계. 그 시절 그는 득시글거리는 힘센 왕자들 틈에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어린 세자의 안위가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따라서 이성계의 관심은 온통 사병혁파와 군권장악에 집중돼 있었다. 그럼에도 '태조실록'에는 정도전과 남은은 무모한 북벌론자로, 조준은 신중한 반전론자로 기술돼 있다. '태조실록'이 공연이 끝난 뒤에 쓰인 연극 대본이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은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 당시 명나라는 권력다툼 때문에 정국이 어수선했다. 또 주원장 스스로 "만일 조선이 20만 대군을 내어 쳐들어온다면 우리 군대가 어찌 막겠는가?"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창업자들이 유교사상에 젖은 철저한 사대주의자들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요동 정벌론은 순전히 '국내용'이었을 수도 있다. 조선 창업의 주인공 정도전은 유교철학을 기반으로 한, 재상 중심의 이상국가를 꿈꿨다. 하지만 그 꿈에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원대한 이상'은 들어 있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다만 그의 정적들이 나중에 작성한 '태조실록'에 무작정 '요동정벌'이란 말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언제, 어떻게 거병을 하자는 언급도 전혀 없다. 조선사 최고 논객인 정도전이 앞뒤 설명도 없이 무작정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자고 했을까. 더구나 당시 모든 관직을 내놓고 사실상 백의종군한 정도전이.

단언컨데, 이성계와 정도전은 '요동정벌'이 아니라 '독립경영'을 꿈꿨던 것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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