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효종의 북벌론과 최영·이성계·정도전의 북벌
설경.
2008. 5. 1. 14:33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효종의 북벌론과 최영·이성계·정도전의 북벌론/반대파 견제하려고 외세와 대립
17세기 중반, 조선 선비들이 중화(中華)로 섬기던 명나라가 청에 무너졌다. 한족 사회의 '매너리즘'을 만주족의 야성이 대체하게 된 것이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조선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병자년(1636년) 말에는 청나라 군대가 거센 삭풍처럼 조선에 들이닥친다. 그 기동성에 기겁을 한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해보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었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적장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인조의 세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은 주전론을 펴던 몇몇 신하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왕으로서 위신과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 인조의 가슴은 치욕의 상처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한편,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심양에 머무르는 8년 동안 서양 문물에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인 선교사를 통해 국제적 안목도 갖추었다. 그러면서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아 능숙하게 처리하기도 했다. 탁월한 그 외교능력 때문에 청나라는 종종 인조 임금을 제쳐두고 소현세자를 외교 파트너로 삼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소현세자의 '친청외교'에 대해, 국내의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딴죽을 걸었던 것이다. 치욕을 간직한 인조 임금 또한, 이 잘난 아들을 질시의 눈으로 보게 된다.
1645년, 아들들이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박대했다. 그러던 차에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만다. 귀국한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인조의 뜻이 반영됐다고 한다. 내친 김에 인조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죽게 했다.
큰아들 일가를 숙청해버린 인조 임금. 그는 차기 정권을 둘째 봉림대군에게 넘겨줬다. 어쩌면 애초부터 인조는 효성 지극한 둘째 봉림대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효종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채소나 과일 같은 하찮은 것도 반드시 먼저 인조께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항상 효자라고 칭찬해 사랑과 기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봉림대군은 세자가 됐다. 더불어 1649년에는 위독한 인조에게 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이는 효성을 선보였고, 인조가 승하하자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여러 날 통곡한 다음에 왕이 됐다. 그가 곧 효종이다.
효종 역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이나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형과 달리 끝까지 청나라를 아버지의 원수로 여겼다. 그런 까닭에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원한을 쌓아놓은 터였다. 그리해 효종은 즉위 초부터 북벌(北伐)을 추진한다. 양자강 이남에 아직 버티고 있는 남명(南明) 세력과 청이 싸우는 틈을 타서, 요동을 치려는 전략이었다. 그는 직접 열병식에 참석하면서 군사훈련을 독려했다. 또 부패 혐의로 구설수에 오른 이완을, 뛰어난 무인이라는 이유로 어영대장에 특별히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효종의 북벌정책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신진 사류들과 대립하던 영의정 김자점이 앙심을 품고 "우리나라가 북벌(北伐)을 계획하고 있고, 인조의 능 지문(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써넣지 않았다"고 청나라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청나라는 10여 차례나 조사단을 파견해 조선 조정을 뒤집어 놓았다. 효종은 영의정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 것으로 몰아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재위 10년간 무리하게 추진한 군사력 강화정책은 백성들의 신음을 자아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가뜩이나 민심이 피폐한 터였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그러자 효종은 자신의 스승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끌어 들임으로써, 사대부들의 비판을 잠재우려 한다. 그리해 효종 10년(1659년) 3월 11일. 효종은 사관(史官)과 환관을 모두 물리친 뒤에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를 했다. 그 자리에서 효종은 송시열의 동의를 어느 정도 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론을 인정하면서도, 직접적인 군사행동보다는 국내 정세를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슬로건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론은 서로 달랐다.
고려 말 최영의 북벌론은 내심 이성계 세력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더불어 그것은 명나라에 대한 간접 도전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북벌론 또한 사병 혁파를 위한 '국내용'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효종의 북벌론은 대륙의 새 주인이 된 청나라와 실제로 '진검승부'를 펼치려는 의도로 추진됐다. '효종(孝宗)'이라는 그의 존호가 나타내듯, 그는 효성 때문에 왕이 됐으며, 역시 아버지 인조의 수모를 되갚으려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북벌을 추진했던 것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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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비 동판
한편,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심양에 머무르는 8년 동안 서양 문물에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인 선교사를 통해 국제적 안목도 갖추었다. 그러면서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아 능숙하게 처리하기도 했다. 탁월한 그 외교능력 때문에 청나라는 종종 인조 임금을 제쳐두고 소현세자를 외교 파트너로 삼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소현세자의 '친청외교'에 대해, 국내의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딴죽을 걸었던 것이다. 치욕을 간직한 인조 임금 또한, 이 잘난 아들을 질시의 눈으로 보게 된다.
1645년, 아들들이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박대했다. 그러던 차에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만다. 귀국한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인조의 뜻이 반영됐다고 한다. 내친 김에 인조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죽게 했다.
큰아들 일가를 숙청해버린 인조 임금. 그는 차기 정권을 둘째 봉림대군에게 넘겨줬다. 어쩌면 애초부터 인조는 효성 지극한 둘째 봉림대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효종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채소나 과일 같은 하찮은 것도 반드시 먼저 인조께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항상 효자라고 칭찬해 사랑과 기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봉림대군은 세자가 됐다. 더불어 1649년에는 위독한 인조에게 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이는 효성을 선보였고, 인조가 승하하자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여러 날 통곡한 다음에 왕이 됐다. 그가 곧 효종이다.
효종 역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이나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형과 달리 끝까지 청나라를 아버지의 원수로 여겼다. 그런 까닭에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원한을 쌓아놓은 터였다. 그리해 효종은 즉위 초부터 북벌(北伐)을 추진한다. 양자강 이남에 아직 버티고 있는 남명(南明) 세력과 청이 싸우는 틈을 타서, 요동을 치려는 전략이었다. 그는 직접 열병식에 참석하면서 군사훈련을 독려했다. 또 부패 혐의로 구설수에 오른 이완을, 뛰어난 무인이라는 이유로 어영대장에 특별히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효종의 북벌정책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신진 사류들과 대립하던 영의정 김자점이 앙심을 품고 "우리나라가 북벌(北伐)을 계획하고 있고, 인조의 능 지문(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써넣지 않았다"고 청나라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청나라는 10여 차례나 조사단을 파견해 조선 조정을 뒤집어 놓았다. 효종은 영의정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 것으로 몰아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재위 10년간 무리하게 추진한 군사력 강화정책은 백성들의 신음을 자아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가뜩이나 민심이 피폐한 터였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그러자 효종은 자신의 스승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끌어 들임으로써, 사대부들의 비판을 잠재우려 한다. 그리해 효종 10년(1659년) 3월 11일. 효종은 사관(史官)과 환관을 모두 물리친 뒤에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를 했다. 그 자리에서 효종은 송시열의 동의를 어느 정도 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론을 인정하면서도, 직접적인 군사행동보다는 국내 정세를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슬로건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론은 서로 달랐다.
고려 말 최영의 북벌론은 내심 이성계 세력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더불어 그것은 명나라에 대한 간접 도전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북벌론 또한 사병 혁파를 위한 '국내용'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효종의 북벌론은 대륙의 새 주인이 된 청나라와 실제로 '진검승부'를 펼치려는 의도로 추진됐다. '효종(孝宗)'이라는 그의 존호가 나타내듯, 그는 효성 때문에 왕이 됐으며, 역시 아버지 인조의 수모를 되갚으려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북벌을 추진했던 것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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