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고교생을 위한 철학 카페] 공자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설경.
2008. 5. 8. 14:05
오늘 부모님과 나 사이의 '자연스러움' 찾아봅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답은 산부인과 의사, 혹은 그에 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격적 교감을 나누는 존재는? 이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엄마나 아빠, 즉 부모님이 답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숱한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이다. 누가 모를까?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하지만 그 당연함에 숨어 있는 깊이는 사실 매우 깊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다. 그 관계가 자연스럽다는 것은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반성이 필요 없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 사람이 나의 엄마임을, 혹은 아빠임을 인정하기 위해 숱하게 많은 생각들이 쌓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 역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을 할 수는 있어도 일단 생명이 뱃속에 잉태된 이후로 그 생명체가 자신의 아이인가를 고민하고 또 반성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관계가 가장 자연스런 것이기에 여기에는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적 초석이 숨겨져 있다. 자녀와 부모가 서로를 대하는 모습은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옛말에도 그렇지 않았는가,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고. 그만큼 이 둘의 관계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인격체가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관계인 것이다.
공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자연스런 관계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사상가이다. 그는 단순한 초석을 넘어서 사회적 관계의 전형이라 이해했다. 이 관계를 다른 사람에 대한 행위를 결정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 정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모방해야 할 원형으로 강조했다. 풀어 말하자면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사회 일반에 확대시켜 내 부모, 내 자녀를 대하듯 남의 부모와 자녀를 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가 당대의 사회적 혼란의 문제를 가족관계가 해체된 것으로부터 찾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가족들이 서로를 대하는 마땅한 방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사람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을 상실했다고 파악했다. 그래서 사회가 그다지도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가족의 핵심인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회복해야 사회의 모든 관계도 바로잡히고 나아가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공자의 의견은 물론 가족관계를 기반으로 했던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를 분석한 것이기에 그와 같은 설명은 적어도 당대에는 설득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민주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오늘 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평가할 필요는 없겠다. 즉 부자관계가 모든 관계의 초석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모두에게 똑같이 확장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그 마음, 그 태도가 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중요한 관계라는 점이다. 따라서 적어도 부모와 자녀의 바른 관계 정립은 다른 모든 인간관계의 모범답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이 사회를 너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는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엄마와, 혹은 아빠와 함께라면 의기양양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세상이 무너질 듯한 슬픔이 있더라도 내 새끼를 보면 하늘을 다 얻은 마냥 즐거울 수 있는 사랑스러움. 이것이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나누어야 할 진정한 자연스러움 아닐까. 사회가 혼란스럽고 인심이 흉흉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기본적 마음가짐의 중요성은 배가 된다. 이런 마음이 정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나누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도, 직장 상사에게 크나큰 꾸중을 들어도 내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단단함이 묻어난다. 수능 성적이 안 좋게 나왔다고, 직장에서 자기를 버렸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단단함.
며칠 전, 많은 가정에서 아이들과 특별하고도 즐거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또 오늘은 어버이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특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무엇인가 '날'을 잡는 것은 좀 더 특별하게 사랑하라는, 혹은 그 동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원초적인 의도가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별된 '날'은 평상시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지 않았었다는 점을 고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린이날 하루, 어버이날 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한 이벤트성 계획보다 남은 모든 날들 속에서 서로의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오히려 그 '날'에 필요하지 않을까.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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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답은 산부인과 의사, 혹은 그에 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격적 교감을 나누는 존재는? 이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엄마나 아빠, 즉 부모님이 답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숱한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이다. 누가 모를까?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하지만 그 당연함에 숨어 있는 깊이는 사실 매우 깊다.
↑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 공자
그 관계가 가장 자연스런 것이기에 여기에는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적 초석이 숨겨져 있다. 자녀와 부모가 서로를 대하는 모습은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옛말에도 그렇지 않았는가,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고. 그만큼 이 둘의 관계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인격체가 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관계인 것이다.
공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자연스런 관계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사상가이다. 그는 단순한 초석을 넘어서 사회적 관계의 전형이라 이해했다. 이 관계를 다른 사람에 대한 행위를 결정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 정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모방해야 할 원형으로 강조했다. 풀어 말하자면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사회 일반에 확대시켜 내 부모, 내 자녀를 대하듯 남의 부모와 자녀를 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가 당대의 사회적 혼란의 문제를 가족관계가 해체된 것으로부터 찾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가족들이 서로를 대하는 마땅한 방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사람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을 상실했다고 파악했다. 그래서 사회가 그다지도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가족의 핵심인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회복해야 사회의 모든 관계도 바로잡히고 나아가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공자의 의견은 물론 가족관계를 기반으로 했던 주나라의 봉건적 질서를 분석한 것이기에 그와 같은 설명은 적어도 당대에는 설득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민주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오늘 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평가할 필요는 없겠다. 즉 부자관계가 모든 관계의 초석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모두에게 똑같이 확장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그 마음, 그 태도가 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중요한 관계라는 점이다. 따라서 적어도 부모와 자녀의 바른 관계 정립은 다른 모든 인간관계의 모범답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이 사회를 너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는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엄마와, 혹은 아빠와 함께라면 의기양양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세상이 무너질 듯한 슬픔이 있더라도 내 새끼를 보면 하늘을 다 얻은 마냥 즐거울 수 있는 사랑스러움. 이것이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나누어야 할 진정한 자연스러움 아닐까. 사회가 혼란스럽고 인심이 흉흉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기본적 마음가짐의 중요성은 배가 된다. 이런 마음이 정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나누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도, 직장 상사에게 크나큰 꾸중을 들어도 내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단단함이 묻어난다. 수능 성적이 안 좋게 나왔다고, 직장에서 자기를 버렸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단단함.
며칠 전, 많은 가정에서 아이들과 특별하고도 즐거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또 오늘은 어버이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특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무엇인가 '날'을 잡는 것은 좀 더 특별하게 사랑하라는, 혹은 그 동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원초적인 의도가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별된 '날'은 평상시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지 않았었다는 점을 고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린이날 하루, 어버이날 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한 이벤트성 계획보다 남은 모든 날들 속에서 서로의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오히려 그 '날'에 필요하지 않을까.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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