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
설경.
2008. 5. 22. 13:24
'깜짝쇼'에도 눈 깜박 안 하는 태조의 집념
천도(遷都), 즉 수도를 옮기는 일은 엄청난 국가적 프로젝트다. 거기에는 먼저 필연적 명분이 있어야 하고, 대규모 공사를 일으킬 막대한 비용도 마련돼야 한다. 하지만 더욱 어려운 문제는 옛 수도를 떠나기 싫어하는 기득권자들의 필사적인 반발이다. 역대 군왕들의 천도 계획은 그러한 저항에 직면해 늘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600년 도읍지 한양이 세워질 무렵에도 그랬다.
1392년 7월 17일. 조선의 왕이 된 이성계는, 숱한 정치투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즉위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도평의사사에 한양천도를 공표한다. 당시 남경(南京)으로 불리던 한양은 행궁을 갖춘, 고려 3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태조는 한양에서 쓸 만한 궁실을 찾아 수리해 당장 천도를 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해 가을 시중 배극렴과 조준 등은 날이 점차 추워지고 있으니 제대로 궁실과 성곽을 갖춘 뒤에 도읍을 옮기자고 건의했다. 개경에 갖가지 기득권을 쌓아둔 고관대작들도 임금의 발목을 붙잡았다.
태조는 그 청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권중화를 시켜 한양 이외의 새 도읍 후보지를 물색하게 한다. 그리고 1393년 1월 2일에 권중화는 계룡산 일대를 신도시 후보지로 꼽고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만들어 바쳤다. 태조는 고위관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왕사 자초(무학대사)와 안종원·김사형·이지란·남은 등과 함께 계룡산으로 답사를 떠난다. 그러자 도평의사사에서 보낸 정요가 태조 일행을 급히 뒤쫓아 와서는 현비 강씨가 병환이 났으며, 답사 길 주변에 초적(草賊)이 있으므로 계룡산 행을 멈추라고 태조에게 간언한다. 이에 태조는 불쾌한 기색으로, 초적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는지를 정요에게 물었다. 정요가 대답을 못하자 태조가 말한다.
"도읍을 옮기는 일을 싫어하는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구실을 만들어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개경에 오랫동안 살아온 그들이 어찌 천도를 내켜 하겠는가?"
정요를 꾸짖어 돌려보낸 태조는 더욱 걸음을 재촉해 계룡산에 이른다. 그리고 지세를 살펴본 뒤 그곳에 신도시를 세우게 했다. 1393년 3월부터 계룡산 기슭에는 신도시를 건설하는 망치 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 쳤다.
하지만 1393년 가을, 그 망치소리를 멈추게 한 인물이 있었다.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이었다. 그는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물이 장생(長生)을 깨뜨려서 쇠패(衰敗)가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상서를 올렸다. 한마디로, 계룡산에 도읍을 세우면 왕조가 곧 망한다는 엄포였다. 잡학에 능한 백과사전적 인물이었던 하륜. 그는 역성혁명 과정에서 이색 계열로 분류돼 정계에서 추방을 당했다가 조선 창업 뒤에 다시 지방관직을 전전하게 된 터였다. 비주류인 그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천도론에 제동을 걸며 '깜짝쇼'를 벌인 것이다.
껄끄러운 마음이 든 태조는 그해 12월에 계룡산 신도 건설을 중지시키고는 하륜더러 터를 직접 물색케 했다. 하륜은 무악(서울 신촌 일대)을 꼽았다. 1394년 8월. 무악을 직접 답사한 태조는 신료들과 함께 입지 논쟁을 벌였다. 동행한 신료들 대부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오직 하륜만이 무악 천도를 끈질기게 주장한다.
"무악이 나라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선현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부합되옵니다. 만세를 위한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이때 조선의 기획가 정도전은 풍수지리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중국에서도 나라를 일으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한 곳은 관중·금릉·낙양·연경 등 네 곳뿐이 옵니다. 도읍 터는 자연히 정해져 있는 것이지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정도전은 천도 연기를 주장했다. 분분한 의견에 기색이 언짢게 된 태조는, 애초에 천도 예정지로 꼽았던 한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다시 의견을 물었다. 천도를 향한 태조의 집념을 확인한 대신들은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고 합창을 했다. 오직 하륜만이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 술법으로 보면 좋지 못합니다."라며 또 '술법'을 운운했다. 태조는 마지막으로 왕사 자초의 의견을 물었다. 자초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편편해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만하다"고 말했다. 결국 태조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한다.
계룡산 도읍 공사를 중지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무악을 새 도읍지로 관철시키는 데 실패한 하륜. 결국 그의 '깜짝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한편,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한양 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태조에게 무학대사는 자신의 의지를 비추어보는 거울 같은 친구일 뿐이었다. 한양 천도는 결국 태조의 집념이 대신들의 논쟁에 대해 승리한 결과였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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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遷都), 즉 수도를 옮기는 일은 엄청난 국가적 프로젝트다. 거기에는 먼저 필연적 명분이 있어야 하고, 대규모 공사를 일으킬 막대한 비용도 마련돼야 한다. 하지만 더욱 어려운 문제는 옛 수도를 떠나기 싫어하는 기득권자들의 필사적인 반발이다. 역대 군왕들의 천도 계획은 그러한 저항에 직면해 늘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600년 도읍지 한양이 세워질 무렵에도 그랬다.
1392년 7월 17일. 조선의 왕이 된 이성계는, 숱한 정치투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즉위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도평의사사에 한양천도를 공표한다. 당시 남경(南京)으로 불리던 한양은 행궁을 갖춘, 고려 3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태조는 한양에서 쓸 만한 궁실을 찾아 수리해 당장 천도를 할 기세였다. 하지만 그해 가을 시중 배극렴과 조준 등은 날이 점차 추워지고 있으니 제대로 궁실과 성곽을 갖춘 뒤에 도읍을 옮기자고 건의했다. 개경에 갖가지 기득권을 쌓아둔 고관대작들도 임금의 발목을 붙잡았다.
태조는 그 청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권중화를 시켜 한양 이외의 새 도읍 후보지를 물색하게 한다. 그리고 1393년 1월 2일에 권중화는 계룡산 일대를 신도시 후보지로 꼽고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만들어 바쳤다. 태조는 고위관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왕사 자초(무학대사)와 안종원·김사형·이지란·남은 등과 함께 계룡산으로 답사를 떠난다. 그러자 도평의사사에서 보낸 정요가 태조 일행을 급히 뒤쫓아 와서는 현비 강씨가 병환이 났으며, 답사 길 주변에 초적(草賊)이 있으므로 계룡산 행을 멈추라고 태조에게 간언한다. 이에 태조는 불쾌한 기색으로, 초적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는지를 정요에게 물었다. 정요가 대답을 못하자 태조가 말한다.
"도읍을 옮기는 일을 싫어하는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구실을 만들어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개경에 오랫동안 살아온 그들이 어찌 천도를 내켜 하겠는가?"
정요를 꾸짖어 돌려보낸 태조는 더욱 걸음을 재촉해 계룡산에 이른다. 그리고 지세를 살펴본 뒤 그곳에 신도시를 세우게 했다. 1393년 3월부터 계룡산 기슭에는 신도시를 건설하는 망치 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 쳤다.
하지만 1393년 가을, 그 망치소리를 멈추게 한 인물이 있었다.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이었다. 그는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물이 장생(長生)을 깨뜨려서 쇠패(衰敗)가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상서를 올렸다. 한마디로, 계룡산에 도읍을 세우면 왕조가 곧 망한다는 엄포였다. 잡학에 능한 백과사전적 인물이었던 하륜. 그는 역성혁명 과정에서 이색 계열로 분류돼 정계에서 추방을 당했다가 조선 창업 뒤에 다시 지방관직을 전전하게 된 터였다. 비주류인 그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천도론에 제동을 걸며 '깜짝쇼'를 벌인 것이다.
껄끄러운 마음이 든 태조는 그해 12월에 계룡산 신도 건설을 중지시키고는 하륜더러 터를 직접 물색케 했다. 하륜은 무악(서울 신촌 일대)을 꼽았다. 1394년 8월. 무악을 직접 답사한 태조는 신료들과 함께 입지 논쟁을 벌였다. 동행한 신료들 대부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오직 하륜만이 무악 천도를 끈질기게 주장한다.
"무악이 나라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선현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부합되옵니다. 만세를 위한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이때 조선의 기획가 정도전은 풍수지리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중국에서도 나라를 일으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한 곳은 관중·금릉·낙양·연경 등 네 곳뿐이 옵니다. 도읍 터는 자연히 정해져 있는 것이지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정도전은 천도 연기를 주장했다. 분분한 의견에 기색이 언짢게 된 태조는, 애초에 천도 예정지로 꼽았던 한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다시 의견을 물었다. 천도를 향한 태조의 집념을 확인한 대신들은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고 합창을 했다. 오직 하륜만이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 술법으로 보면 좋지 못합니다."라며 또 '술법'을 운운했다. 태조는 마지막으로 왕사 자초의 의견을 물었다. 자초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편편해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만하다"고 말했다. 결국 태조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한다.
계룡산 도읍 공사를 중지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무악을 새 도읍지로 관철시키는 데 실패한 하륜. 결국 그의 '깜짝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한편,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한양 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태조에게 무학대사는 자신의 의지를 비추어보는 거울 같은 친구일 뿐이었다. 한양 천도는 결국 태조의 집념이 대신들의 논쟁에 대해 승리한 결과였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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