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다시 듣는 ‘아침이슬’ / 아침이슬_ 김민기 양희은
[중앙일보 안도현] 선술집에서 한잔 마시는 중이었는데, 한쪽에서 '아침이슬'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흘러간 추억의 노래가 된 줄로 알았던 가사가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취기가 오른 대여섯의 사내가 어찌나 서럽게 부르던지, 금세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사내들은 무슨 얘길 하다가 저 노래를 불렀을까. 내 귀는 자꾸 사내들이 있는 쪽으로 열리고 있었다. 얼굴이 불콰해진 사내들은 이명박 대통령 얘기며,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얘기며, 고향에서 닭을 놓아먹이는 부모님 얘기며, 일본의 독도 표기 문제 같은 얘기를 앞뒤 없이 꺼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들은 '아침이슬'은 그저 술안주 삼아 부른 노래만은 아닌 듯싶었다. 막걸리나 한잔 하려 했던 내 마음이 문득 5월의 보리밭처럼 술렁거렸다.
김민기가 만든 '아침이슬'은 1970년대 이후 대학가와 이런저런 시위 현장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던 애창곡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서는 방송금지 가요가 되는 수난에도 불구하고 풀뿌리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80년에 만들어진 숱한 민중가요의 원조가 이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아침이슬'이 어느 날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시점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아예 케케묵은 옛 노래로 치부하는 듯했다. 어느 정파가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사람들은 '아침이슬'을 잃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렸다.
이 노래를 잃어버린 시기에 그 기세등등하던 민중가요도, 민중문학도, 민중미술도 꼬리를 슬그머니 내려버렸다. 아무도 '광야의 집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들 '골방의 개인'에만 관심을 두었고, 그게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듯 침묵했다. '민중'은 '인민'의 위장 언어라고 핏대를 올리던 사람들도 별로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교실에 갇혀 있던 초·중·고 어린 학생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다시 '아침이슬'을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시곗바늘이 정말 거꾸로 돌아가는 것일까? 이와 함께 인터넷에서는 미래를 앞당기려는 '이명박 퇴임시계'라는 것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데, 그걸 단지 일부 네티즌의 유희로만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대통령은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국민과의 소통 부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소통은 상대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감동은 연출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농촌 일손을 돕는다고 매우 실용적인 소통을 연출하는 일은 참으로 보기 역겹다. 모내기 철에 이앙기로 모내기하는 기계 논에 들어가 못줄 잡고 모 꽂으며 손모내기하는 사진이나 얼른 한 장 찍고 돌아가는 짓 말이다. 그러면 농민들이 더 화를 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어린 학생들이 촛불을 켜 드는 이 현상을 괴담 탓이라거나, 배후세력의 조종 운운하며 핵심을 피해가거나, 난장판 정도로 인식하는 한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이 켜 드는 촛불의 숫자가 더 늘어날 뿐이다. 그 가녀린 촛불이 횃불이 되고 화염병 불꽃이 되는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흘러간 추억의 노래 '아침이슬'이 시위 현장으로 몰려나온 국민들에 의해 시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노래로 다시금 퍼져나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요즘 이명박 정부는 한마디로 청룡열차를 타고 가는 것 같다. 정부는 청룡열차를 신나게 타고 노는 듯하고, 돈 없는 국민은 그 청룡열차 아래서 빈 호주머니를 뒤적이며 정부가 타고 노는 청룡열차나 멀뚱멀뚱 가슴 쓸어내리며 바라보는 꼴이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끝내 '아침이슬'을 부르는 형국이다. 제발 그 노래의 뒷부분을 부르면서 목을 다치는 국민들이 늘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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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의 문화적 유산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1971년 발표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1972년 봄 그의 음반이 전량수거, 압수되면서 부터 박해와 저항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고비마다 이 노래만큼 널리 불려지고 사랑 받은 노래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군중이 가슴으로 부르는 '아침이슬'은 평화와 민주를 갈망하는 장엄한 오라토리오(oratorio)와 같았고 이제 한국 현대사의 문화적 유산이 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남겨졌다.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이름 - 김민기 시집 없는 시인,그림 없는 화가,노래하지 않는 가수로 불리는 김민기는 자의건 타의건 격랑의 중심에 서게 되고 평범한 화가지망생 이였고 서정적 음률의 가수였던 그는 암울했던 군부독재시절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금지된 삶을 살아왔다. - 펌 김민기양희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