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푸른광장>아, 옛날이여
설경.
2008. 5. 26. 18:05
오랜만에 이대 앞에 갔다. 1970년대 말,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그 길목을 떠올린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던 파리 다방과 빅토리아 다방과 미뇽 다방 등은 내가 즐겨 가는 곳이었다. 그곳에 앉아 니체와 카프카와 키에르케고르를 읽었다. 학교 정문 앞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기찻길과 단 하나의 책방이었던 '이화 책방'과 오리지널 튀김집과 그린하우스와 가미 우동집과, 신촌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늘어서 있던 색시집들과 5월 축제를 기다리는 비싼 맞춤 옷집들과 구두 가게들과 이대 후문 앞의 싸고 맛있는 딸기꼴 분식집 등의 지도가 아직도 어제 본 듯 눈에 선하다.
새로 생긴 수많은 헤어살롱들과 싸고 예쁜 옷들을 파는 옷집들과 액세서리 가게들과 수많은 카페들을 바라보며 그 길목을 걷는 일은 내게 묘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 요즘 학생들은 참 좋겠다. 돈이 없어도 감각만 있으면 싸고 예쁜 옷들로 얼마든지 멋을 낼 수 있는 것이다. 1만원짜리 구두도 멀쩡하기 짝이 없고, 5000원짜리 티셔츠도 예쁘기만 하다. 부자와 빈자가 티가 나지않게 옷을 입을 수 있는 세상, 이 풍요로운 세상에 감탄하면서 옛 생각을 떠올리며 걷는다. 죽치고 앉아 책을 읽던 그 옛날의 클래식 다방들은 사라지고 스타벅스같은 대형 커피점들이 들어섰다.
그때와 달라진 건 그 시절의 우리가 그렇게도 열광하던 디스크자키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이드파크 다방이었을까? 여대생들에게 인기 짱이던 꽃미남 디스크자키의 얼굴이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좋다 하면 싫다 하고, 싫다 하면 좋다 하던 그 엇갈리던 고통스러운 젊음의 시간들, 누구의 젊음인들 그렇지 않으랴? 군대 간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 착한 여자가 돼보지도 못하고 대학 4년이 화살처럼 흘러갔다.
그 시절 나는 학교 수업과의 불협화음에 늘 행복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빨리 나이가 들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사춘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공부를 무척 잘하는 아이였다. 사춘기란 학교 교실을 떠나 창 밖의 풍경들에 마음을 뺏기는 산만함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어쨌든 학교라는 제도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림을 그리는 자유인이 되어 있는 지금 이 자리는 그러니까 내게는 행복한 자리다.
이대 앞을 넋놓고 서성이며 나는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조카를 떠올린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조카의 학교 혐오증은 보통 고등학교가 아니라 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입시 교육에 치우친 무의미한 고등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검정고시를 치겠노라는 당돌한 선언은 먼 옛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검정고시란 비정규적인 과정으로 대학을 가기 위한 또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그것이 그리 쉬울까? 그렇다면 종국에는 대학 또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낙착될지도 모른다.
자식이 없는 탓에 조카 일만 해도 내게는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니 꼭 그래서가 아니라 나 자신 대학의 의미가 그렇게 비중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학교 교육에 빚진 게 있다면 인내심 기르기와 타인과의 화합을 배우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긴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고 싶은 어린 조카에게 인내심이나 타인과의 관계 따위는 따분한 단어이리라. 나 역시 그랬다. 대학 시절 이대 정문 앞에서 신촌역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에 한복을 입고 앉아 있던 내 또래의 색시집 아가씨들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며 뭘 보느냐고 시비를 걸곤 했다.
그녀들은 대학생인 우리가 얼마나 부러웠을까? 조카에게 그런 얘기들을 들려주며, 공부시켜주는 고마운 부모님 운운해봐야 씨알도 안먹힐 일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어른이 되려는 성장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니 우리 맘이 족할까?
아, 옛날이여. 눈 깜짝할 새 30년이 흐른 오늘 나는 낯설고도 낯익은 이대 앞 거리에 서 있다.
[[황주리 /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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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던 파리 다방과 빅토리아 다방과 미뇽 다방 등은 내가 즐겨 가는 곳이었다. 그곳에 앉아 니체와 카프카와 키에르케고르를 읽었다. 학교 정문 앞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기찻길과 단 하나의 책방이었던 '이화 책방'과 오리지널 튀김집과 그린하우스와 가미 우동집과, 신촌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늘어서 있던 색시집들과 5월 축제를 기다리는 비싼 맞춤 옷집들과 구두 가게들과 이대 후문 앞의 싸고 맛있는 딸기꼴 분식집 등의 지도가 아직도 어제 본 듯 눈에 선하다.
새로 생긴 수많은 헤어살롱들과 싸고 예쁜 옷들을 파는 옷집들과 액세서리 가게들과 수많은 카페들을 바라보며 그 길목을 걷는 일은 내게 묘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 요즘 학생들은 참 좋겠다. 돈이 없어도 감각만 있으면 싸고 예쁜 옷들로 얼마든지 멋을 낼 수 있는 것이다. 1만원짜리 구두도 멀쩡하기 짝이 없고, 5000원짜리 티셔츠도 예쁘기만 하다. 부자와 빈자가 티가 나지않게 옷을 입을 수 있는 세상, 이 풍요로운 세상에 감탄하면서 옛 생각을 떠올리며 걷는다. 죽치고 앉아 책을 읽던 그 옛날의 클래식 다방들은 사라지고 스타벅스같은 대형 커피점들이 들어섰다.
그때와 달라진 건 그 시절의 우리가 그렇게도 열광하던 디스크자키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이드파크 다방이었을까? 여대생들에게 인기 짱이던 꽃미남 디스크자키의 얼굴이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좋다 하면 싫다 하고, 싫다 하면 좋다 하던 그 엇갈리던 고통스러운 젊음의 시간들, 누구의 젊음인들 그렇지 않으랴? 군대 간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 착한 여자가 돼보지도 못하고 대학 4년이 화살처럼 흘러갔다.
그 시절 나는 학교 수업과의 불협화음에 늘 행복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빨리 나이가 들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사춘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공부를 무척 잘하는 아이였다. 사춘기란 학교 교실을 떠나 창 밖의 풍경들에 마음을 뺏기는 산만함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어쨌든 학교라는 제도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림을 그리는 자유인이 되어 있는 지금 이 자리는 그러니까 내게는 행복한 자리다.
이대 앞을 넋놓고 서성이며 나는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조카를 떠올린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조카의 학교 혐오증은 보통 고등학교가 아니라 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입시 교육에 치우친 무의미한 고등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검정고시를 치겠노라는 당돌한 선언은 먼 옛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검정고시란 비정규적인 과정으로 대학을 가기 위한 또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그것이 그리 쉬울까? 그렇다면 종국에는 대학 또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낙착될지도 모른다.
자식이 없는 탓에 조카 일만 해도 내게는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니 꼭 그래서가 아니라 나 자신 대학의 의미가 그렇게 비중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학교 교육에 빚진 게 있다면 인내심 기르기와 타인과의 화합을 배우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긴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고 싶은 어린 조카에게 인내심이나 타인과의 관계 따위는 따분한 단어이리라. 나 역시 그랬다. 대학 시절 이대 정문 앞에서 신촌역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에 한복을 입고 앉아 있던 내 또래의 색시집 아가씨들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며 뭘 보느냐고 시비를 걸곤 했다.
그녀들은 대학생인 우리가 얼마나 부러웠을까? 조카에게 그런 얘기들을 들려주며, 공부시켜주는 고마운 부모님 운운해봐야 씨알도 안먹힐 일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어른이 되려는 성장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니 우리 맘이 족할까?
아, 옛날이여. 눈 깜짝할 새 30년이 흐른 오늘 나는 낯설고도 낯익은 이대 앞 거리에 서 있다.
[[황주리 /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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