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시사 이슈로 본 논술] 묻지마 살인과 '히키코모리'를 엮지 말라
설경.
2008. 9. 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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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묻지마 살인사건
올 8월 중순에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이 아무 이유 없이 살해됐다. 지난 7월에는 강원도 어느 시청 민원실에 들어간 범인이 "세상살이가 싫어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가고 싶었다"며 처음 본 여성 공무원을 살해했다. 묻지마 살인사건은 일본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발생하는 무차별 살인사건을 뜻하는 '도오리마 지켄'('도오리마'는 거리의 악마, '지켄'은 사건을 뜻하는 일본말)은 공포 그 자체다. 최근에 일본의 번화가인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지나가던 시민 7명이 살해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묻지마 살인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피해자와 가해자는 이전에 어떠한 인간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둘째, 살인의 이유가 명백하지 않다. 단순히 죽이고 싶었다, 혹은 막연한 사회적 불만이 쌓여서 그랬다는 식이다.
■묻지마 살인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히키코모리
범죄 사회학자나 언론은 한국과 일본의 묻지마 살인사건의 독특한 배후를 찾아냈다. 범인의 대부분이 사회 부적응자, 혹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들이다. '히키코모리'는 일본어의 '히키코모루'에서 출발한다. '틀어박히다. 죽치다'라는 뜻의 '히키코모루'의 명사형인 '히키코모리'는 '어디 어디에 틀어박히는 것(사람)'을 일컫는다. '히키코모리'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사이토우 타마키씨는 '히키코모리 구출 매뉴얼'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히키코모리는 병이 아니다. '부등교(不登校)'나 '가정 내 폭력'이라는 단어와 같이 하나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사회적 히키코모리'는 ①(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사회 참가를 하지 않는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고, ②정신장애가 그것의 제1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단, '사회 참가'라는 것은 취학, 취직을 하고 있는 상태, 혹은 가족 이외에 친밀한 관계가 있는 상태를 가르킴)이다."
■히키코모리 현상으로 바라본 일본의 사회문제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는 1970년대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신과 의사들이 진찰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2001년이 돼서야 후생노동성에 특별연구반을 조직해 본격적으로 실태를 조사했다. 히키코모리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절은 일본이 고도 성장기를 거쳐, 거품경제가 시작되는 시기와 묘하게 일치한다. 경제적 불황 속에서 일본인들이 겪은 '마음의 위기'상태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처음에는 사회 심리학자, 혹은 정신의학자들이 히키코모리를 개인이 가진 정신병적 문제로 접근했으나 정부가 관심을 가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사회문제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히키코모리 숫자는 정부 발표로는 120만명으로 30가정에 1명꼴이고, 관련 민간단체는 2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전문가들이 밝혀낸 히키코모리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친구가 없는 경우, 이지메 당하는 경우, 대인관계의 기술이 부족한 경우, 가정 폭력 및 학대, 가정·학교·사회에서 인정 못 받는 경우, 자기중심적인 인간관의 형성, 획일적인 사회문화 구조, 자립성이 부족한 사회 구조(부모에 의존하는문화권), 자신감 부족, 수험·취직의 실패, 용모 콤플렉스'등이다.
■일본의 히키코모리와 한국의 사회 문제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가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지르면서 사회적 관심이 모아졌듯이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것이다. 히키코모리의 원인을 보면 한국도 똑같이 겪고 있는 사회문화 및 교육시스템의 문제점이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분위기와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배려해주지 못하는 경제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은 히키코모리 현상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는 구조다. 올초 일본의 히키코모리 관련 시민단체가 서울의 노량진 고시촌을 방문하고 앞으로 한국에서 히키코모리 현상이 본격화될 것으로 진단했다. 늘어나는 실업률과 중산층의 붕괴, 학교나 직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히키코모리 현상의 촉매제가 된다. 사회적 존재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 자신의 실패를 사회구조 탓으로만 돌리는 묻지마 살인사건의 태도는 자유의지 실천자로서 인간이 가진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참고로, 묻지마 살인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은 히키코모리 성향을 보여준다는 언론의 보도태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살인사건과 히키코모리의 강한 상관관계를 넘어 히키코모리 현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나중에 반드시 살인사건을 저지른다는 인과관계를 암묵적으로 설정한다. 개인의 정신병적 기질이 아니라 사회구조 모순 속에서 이유를 찾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강방식 동북고 교사·EBS 사고와 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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