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기회주의 권신 유자광이 유향소 복립에 발벗고 나선 까닭
설경.
2008. 9. 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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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를 강화하기 위한 사림의 노력은 끈질겼다. 1484년 12월에는 이조정랑 이복선이 다시 유향소 복립을 청했고, 이듬해 1월에는 정성근이 향사례와 향음주례 등을 장려할 것을 건의했다. 모범적인 행실을 하는 사람을 가려 지방관아에서 잔치를 베풀어주는 풍속이었다. 1486년 말에는 대사간 김수손과 시강관 정성근이 차례로 나서 유향소 논쟁의 불씨를 이어갔다.
그러던 1488년 3월에 장령 김미가 전라도 지방의 어지러운 치안과 무너진 풍속을 예로 들며, 감사 3년 임기제와 유향소 설치를 건의했다. 하지만 영의정 윤필상이 이를 가로막았다.
"감사의 임기를 3년으로 하자는 법은, 만일 그가 어질면 가하지만 혹 용렬할 것 같으면 폐단을 끼칠 것입니다. 유향소 또한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폐단이 생깁니다. 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려서 행하니, 감사와 수령을 적임자로 임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중앙집권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성종 또한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니, 관리가 받들어 행동하지 않으면 비록 새로운 법을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유익하겠는가?"라며,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사림세력의 유향소 복립 운동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전혀 뜻밖의 인물이 유향소 복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역사 속 간신으로 혹평을 받고 있는 유자광이었다. 나중에 연산군을 부추겨 피비린내 나는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유자광이 1488년 4월. 뜬금없이 유향소 복립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유향소를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향리가 고을수령보다 유향소관리를 더 두려워해 그 폐단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만, 풍속의 교화에 도움 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유향소를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유자광의 주장에 성종은 2품 이상 관료들이 참여하는 대토론회를 기획했다. 1488년 5월 12일, 유향소 설치를 위한 열띤 토론회가 열렸다. 적극적 반대론자 성준은 어김없이 '이시애의 난'을 들먹이며 유향소 반대론을 펼쳤다. 홍응· 윤호· 이칙 등도 예의 그 '인물난'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찬성 쪽 의견이 더 거셌다. 무엇보다도 영의정 윤필상이 찬성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대신들이 줄줄이 찬성 대열에 섰다.
그런 분위기에 고무된 성종은 흔쾌히 유향소 복립을 명하고, 사헌부에 유향소와 관련된 절목을 마련케 했다. 무려 6년에 걸쳐 꾸준하게 복설(復設)운동을 벌인 결과였다. 결국 유향소는 재건됐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사실이 남는다. 기회주의 권신의 전형으로 알려진 유자광은 왜 갑자기 유향소 복립을 주장했던 것일까? 게다가 영의정 윤필상은 왜 한 달 만에 유향소 반대에서 적극적 찬성론자로 돌변한 것일까?
유향소와 반란 사건의 관련성을 놓고 딜레마에 빠져 있던 성종은, 어느 날 승지를 불러 이시애의 난과 관련된 기록을 조사하게 했다. 더불어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을 직접 토벌한 유자광에게도 이시애의 반란과 유향소의 관련성을 다그쳐 물었다. 순간 유자광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칫 거짓증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다. 임금의 심기를 살피던 유자광은 그만 훈구파의 주장을 뒤집어버린다.
"전하! 신이 알기로는 이시애의 반란은 유향소보다는 수령의 수탈이 심했던 데에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러면서 유자광은 한 술 더 떠서 유향소 복립운동에 스스로 앞장을 서게 된다.
유향소 복립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성종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 있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했던 훈구 대신들은 이시애의 난을 논쟁에 끼워넣어 '무관련성의 오류'와 '두려움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했다. 성종이 사림세력을 중용하고도 유향소 복립에 선뜻 동조하지 못한 것은 결국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자광의 증언으로 두려움을 털고 오류에서 빠져 나온 성종은 곧장 사림 세력 편에 섰다.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영의정 윤필상 등도 한 달 만에 정치적 입장을 바꿔 찬성표를 던지기에 이르렀다. 훈구세력의 의도적인 거짓 증언은 한동안 임금을 오류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오류가 밝혀지는 순간, 그들은 부메랑에 맞고 말았다. 즉 논쟁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논쟁에서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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