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레바퀴' 밑엔 노비가 있었다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된 '쇄미록'이라는 옛 책이 있다. 오희문(1539∼1613)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나라 상황을 기록한 일기문이다. 저자는,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아버지다. 오희문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란 중에 보고 들은 귀중한 역사 자료를 '쇄미록'에 남겼다. 그런데 거기에는 당시 노비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도 나온다.
오희문 집에 열금이라는 늙은 노비가 중병이 들었다. 그런데 죽지는 않고 음식을 평소처럼 먹어댔다. 그러자 오희문은 어차피 죽을 목숨, 곡식 축내지 말고 어서 죽었으면, 하는 속내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사흘 뒤에 열금이 죽자 "비록 죽었으나 그리 애석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오희문은 노비 몇을 시켜, 열금의 시신을 양지에 묻어주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날이 춥다는 이유를 대며 장지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지조 있는 선비 집에서 평생을 일한 늙은 노비의 처량한 최후였다.
우리가 아는 인류의 역사는 대개 통치자들의 역사다. 흔히 말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관용적 표현에 따른다면 역대 통치자들은 수레 위에서 고삐를 쥔 사람들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온몸으로 떠받치는, 진짜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수의 피통치자들이며, 그 중에서도 수레의 하중을 가장 많이 받은 계층은 바로 노비(奴婢)였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 그들은 과연 어떻게 노비가 됐을까?
한반도에서 노비의 존재는 고대 기자(箕子)조선의 팔조법금에 처음 나타난다. 당시에는 주로 범죄자를 노비로 삼았다.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넘쳐나는 포로들이 노비가 됐다. 전쟁이 수그러든 고려시대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만들어 노비 세습을 법으로 정했다. 어미가 노비면 그 자녀 모두 노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이 소유한 노비 수가 늘고, 양민이 줄어들자 고려 조정은 시름에 잠겼다. 노비들 처지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다. 조세 수입 감소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앙 통치자들은 전민변정도감과 같은 기관을 설치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한때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이 시행되기도 했다. 그런데 힘 있는 양반이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 사회다보니 종부법은 양반 수를 급격히 늘려놓았다. 이래저래 모두 문제였다. 그래서 영조 대에는 종모법과 종부법을 절충한 '종모종량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케 하였다. 그러나 사노비 수는 여전히 늘어만 갔다. 노비는 노비를 낳았다. 그렇다면 그들도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는 말일까? 물론 노비의 혼인을 법으로 금했던 것은 아니지만, 노비가 혼인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 대부분은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들은 그것을 묵인하였다.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들어 관노비는 밖에서 가정을 꾸리고 독립생활을 했지만, 대다수 사노비들은 주인집 행랑채 한 귀퉁이나, 주인집과 가까운 곳에 허름한 초가집을 짓고 가족 단위로 살았다. 대부분 단출한 모자(母子)가정이거나, 서로 핏줄이 다른 재결합 가족이었을 터다. 그러면서 노비들은 주인과 그 가족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허리가 휘도록 일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도 차지하지 못하였다. 단지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다.
16세기 이후 극심한 자연재해로 흉년을 맞을 경우 정부에서는 일정량의 곡식을 납부하면 노비신분을 면해주는 납속책(納粟策)이 실시되었다. 사정이 나은 관노비나 밤잠을 설쳐 가며 몰래 일하여 별도의 재산을 모은 극소수 사노비들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납속책은 더욱 자주 실시됐고, 그에 따라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아졌다. 노비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노비제도의 틀을 깨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양반 감투도 사고 팔리는 세태와 농민반란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 노비들도 스스로 신분해방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1886년(고종23년) 노비세습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노비의 매매가 금지되었다. 그리고 8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노비제도를 비롯한 조선의 신분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수천 년을 이어 온 노비제도의 관성을 쉽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인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돈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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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096호로 지정된 '쇄미록'이라는 옛 책이 있다. 오희문(1539∼1613)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나라 상황을 기록한 일기문이다. 저자는,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아버지다. 오희문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란 중에 보고 들은 귀중한 역사 자료를 '쇄미록'에 남겼다. 그런데 거기에는 당시 노비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도 나온다.
오희문 집에 열금이라는 늙은 노비가 중병이 들었다. 그런데 죽지는 않고 음식을 평소처럼 먹어댔다. 그러자 오희문은 어차피 죽을 목숨, 곡식 축내지 말고 어서 죽었으면, 하는 속내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사흘 뒤에 열금이 죽자 "비록 죽었으나 그리 애석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오희문은 노비 몇을 시켜, 열금의 시신을 양지에 묻어주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날이 춥다는 이유를 대며 장지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지조 있는 선비 집에서 평생을 일한 늙은 노비의 처량한 최후였다.
우리가 아는 인류의 역사는 대개 통치자들의 역사다. 흔히 말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관용적 표현에 따른다면 역대 통치자들은 수레 위에서 고삐를 쥔 사람들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온몸으로 떠받치는, 진짜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수의 피통치자들이며, 그 중에서도 수레의 하중을 가장 많이 받은 계층은 바로 노비(奴婢)였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 그들은 과연 어떻게 노비가 됐을까?
한반도에서 노비의 존재는 고대 기자(箕子)조선의 팔조법금에 처음 나타난다. 당시에는 주로 범죄자를 노비로 삼았다.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넘쳐나는 포로들이 노비가 됐다. 전쟁이 수그러든 고려시대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만들어 노비 세습을 법으로 정했다. 어미가 노비면 그 자녀 모두 노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이 소유한 노비 수가 늘고, 양민이 줄어들자 고려 조정은 시름에 잠겼다. 노비들 처지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다. 조세 수입 감소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앙 통치자들은 전민변정도감과 같은 기관을 설치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한때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이 시행되기도 했다. 그런데 힘 있는 양반이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 사회다보니 종부법은 양반 수를 급격히 늘려놓았다. 이래저래 모두 문제였다. 그래서 영조 대에는 종모법과 종부법을 절충한 '종모종량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케 하였다. 그러나 사노비 수는 여전히 늘어만 갔다. 노비는 노비를 낳았다. 그렇다면 그들도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는 말일까? 물론 노비의 혼인을 법으로 금했던 것은 아니지만, 노비가 혼인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 대부분은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들은 그것을 묵인하였다.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들어 관노비는 밖에서 가정을 꾸리고 독립생활을 했지만, 대다수 사노비들은 주인집 행랑채 한 귀퉁이나, 주인집과 가까운 곳에 허름한 초가집을 짓고 가족 단위로 살았다. 대부분 단출한 모자(母子)가정이거나, 서로 핏줄이 다른 재결합 가족이었을 터다. 그러면서 노비들은 주인과 그 가족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허리가 휘도록 일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도 차지하지 못하였다. 단지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다.
16세기 이후 극심한 자연재해로 흉년을 맞을 경우 정부에서는 일정량의 곡식을 납부하면 노비신분을 면해주는 납속책(納粟策)이 실시되었다. 사정이 나은 관노비나 밤잠을 설쳐 가며 몰래 일하여 별도의 재산을 모은 극소수 사노비들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납속책은 더욱 자주 실시됐고, 그에 따라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아졌다. 노비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노비제도의 틀을 깨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양반 감투도 사고 팔리는 세태와 농민반란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 노비들도 스스로 신분해방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1886년(고종23년) 노비세습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노비의 매매가 금지되었다. 그리고 8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노비제도를 비롯한 조선의 신분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수천 년을 이어 온 노비제도의 관성을 쉽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인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돈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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