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7세기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중국은 큰 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수·당의 등장으로 정치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졌고,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거듭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삼국 사회는 내부적으로 연개소문이나 의자왕과 같은 독점 권력의 폐해라는 자체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조건 속에 결국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로 역사적 이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을 한반도 최초의 통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는 통일신라? 고려?
이 문제는 한국사에 가장 대표적인 논쟁 가운데 하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통일은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경제력 확충으로 민족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여 신라 삼국 통일의 의의와 함께 한계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반도 최초의 통일로 볼 수 있을까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그만큼 7세기의 한반도 역사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진흥왕 때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점차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여·제(고구려와 백제)동맹을 맺어 신라에 대응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라는 여·제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의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당(신라와 당나라) 연합이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자 본격적으로 삼국의 통일의 야망을 실행해 나간다. 그 첫 번째의 목표는 백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의 정치에 민심이 나빠지고, 사회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백제의 내적인 문제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큰 원인이 되었고, 백제는 결국 660년에 멸망하고 만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까지 공략하게 되는데, 당시 고구려는 수, 당과 연이어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약해졌고, 지도층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고구려 역시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이기지 못하고 668년에 멸망하였다.
신라는 당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르지만, 당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드러내자 당나라와도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결국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소성 싸움과 기벌포 싸움에서 크게 이겨 675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당나라를 물리친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땅을 확보하고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주장은 주로 민족사의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과 발해사 서술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특히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통일신라와 발해를 발해 및 후기 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한다. 북한학계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주로 통일의 과정과 영토 축소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신라의 통일 과정이 반민족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족을 배반하고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자주적이지 못한 통일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결성되었던 나제동맹은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나제동맹은 깨지고 신라와 백제는 적대 관계로 돌아선다. 고구려와 백제의 양공에 처한 신라는 결국 바다 건너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자주적인 통일의 방식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통일신라에 대한 부정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신라의 통일로 한민족의 활동범위가 한반도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졌으며,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해 드넓은 북쪽 땅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의 통일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는 고려라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오면서 이루어진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의 힘을 빌려 이룩한 것이라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민족 화합적 차원에서 이룩한 최초의 자주적인 통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통일로 한민족은 단일민족, 단일문화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한반도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해 경주 중심의 신라의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동시에 고구려 문화가 회복되는 기회를 찾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에 반하여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는 당연히 신라이고,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보이는 한계점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런 것이지 당시 상황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 있다.
첫째,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므로 '통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당시 고구려·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과연 서로를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삼국은 혈통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하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족의식, 민족의식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은 수백 년 동안 100회가 넘게 치열하게 다투었고,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삼국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과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국에 자주, 민족이라는 개념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당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새로 재편되어가는 국제 환경 속에서 신라가 선택한 생존 방식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신라가 만주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앗겼으므로 통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한 의견이라고 본다. 사실상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되었던 땅의 상당 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의 영토로 변했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통일신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은 영토보다 왕조를 강조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의 의미가 강했고,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닌 왕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건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신라의 삼국통일,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일제시대까지 '三韓一統'긍정적 인식 이어져
북한학계선 "외세업은 반쪽 통일" 평가 절하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이후 왕조들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당연히 삼한일통 의식(三韓一統 意識 · 삼국을 한의 동일한 세 집단으로 인식하고 그 삼한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의 영향으로 인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삼국의 동질성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 요소는 언어와 종족이다. 물론 언어나 종족은 선천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삼국의 동질성을 이해하는 것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언어와 종족의 통일성은 문화 전반에 걸쳐 동질적이거나 혹은 동질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 삼국 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강점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 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 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사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었다.
한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북한 학계의 입장은 1979년에 출간된 '조선전사'4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신라가 인민 대중의 당나라 침략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통일)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당나라 침략 반대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가 세워진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7세기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중국은 큰 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수·당의 등장으로 정치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졌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는 통일신라? 고려?
이 문제는 한국사에 가장 대표적인 논쟁 가운데 하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통일은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경제력 확충으로 민족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여 신라 삼국 통일의 의의와 함께 한계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반도 최초의 통일로 볼 수 있을까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그만큼 7세기의 한반도 역사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진흥왕 때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점차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여·제(고구려와 백제)동맹을 맺어 신라에 대응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라는 여·제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의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당(신라와 당나라) 연합이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자 본격적으로 삼국의 통일의 야망을 실행해 나간다. 그 첫 번째의 목표는 백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의 정치에 민심이 나빠지고, 사회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백제의 내적인 문제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큰 원인이 되었고, 백제는 결국 660년에 멸망하고 만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까지 공략하게 되는데, 당시 고구려는 수, 당과 연이어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약해졌고, 지도층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고구려 역시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이기지 못하고 668년에 멸망하였다.
신라는 당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르지만, 당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드러내자 당나라와도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결국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소성 싸움과 기벌포 싸움에서 크게 이겨 675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당나라를 물리친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땅을 확보하고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주장은 주로 민족사의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과 발해사 서술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특히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통일신라와 발해를 발해 및 후기 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한다. 북한학계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주로 통일의 과정과 영토 축소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신라의 통일 과정이 반민족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족을 배반하고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자주적이지 못한 통일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결성되었던 나제동맹은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나제동맹은 깨지고 신라와 백제는 적대 관계로 돌아선다. 고구려와 백제의 양공에 처한 신라는 결국 바다 건너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자주적인 통일의 방식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통일신라에 대한 부정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신라의 통일로 한민족의 활동범위가 한반도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졌으며,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해 드넓은 북쪽 땅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의 통일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는 고려라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오면서 이루어진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의 힘을 빌려 이룩한 것이라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민족 화합적 차원에서 이룩한 최초의 자주적인 통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통일로 한민족은 단일민족, 단일문화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한반도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해 경주 중심의 신라의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동시에 고구려 문화가 회복되는 기회를 찾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에 반하여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는 당연히 신라이고,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보이는 한계점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런 것이지 당시 상황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 있다.
첫째,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므로 '통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당시 고구려·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과연 서로를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삼국은 혈통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하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족의식, 민족의식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은 수백 년 동안 100회가 넘게 치열하게 다투었고,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삼국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과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국에 자주, 민족이라는 개념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당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새로 재편되어가는 국제 환경 속에서 신라가 선택한 생존 방식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신라가 만주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앗겼으므로 통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한 의견이라고 본다. 사실상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되었던 땅의 상당 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의 영토로 변했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통일신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은 영토보다 왕조를 강조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의 의미가 강했고,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닌 왕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건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신라의 삼국통일,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일제시대까지 '三韓一統'긍정적 인식 이어져
북한학계선 "외세업은 반쪽 통일" 평가 절하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이후 왕조들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당연히 삼한일통 의식(三韓一統 意識 · 삼국을 한의 동일한 세 집단으로 인식하고 그 삼한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의 영향으로 인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삼국의 동질성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 요소는 언어와 종족이다. 물론 언어나 종족은 선천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삼국의 동질성을 이해하는 것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언어와 종족의 통일성은 문화 전반에 걸쳐 동질적이거나 혹은 동질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 삼국 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강점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 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 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사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었다.
한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북한 학계의 입장은 1979년에 출간된 '조선전사'4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신라가 인민 대중의 당나라 침략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통일)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당나라 침략 반대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가 세워진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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