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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성화 폭력’과 中의 고민

설경. 2008. 5. 1. 15:53
서울에서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 때 중국인 시위대가 보인 행동에 한국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번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상하이의 한 중국인 교수는 이렇게 전해왔다. 그는 이번 행동은 베이징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일부 불건전한 국가나 세력들에 대해 쌓여온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표출된 것이라며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연수한 또 다른 중국인 교수는 “올림픽 개최에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여운을 남겼다. 올림픽 개최를 위한 열정이라지만, 그 표출 방법이 빗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무분별 때문에 한·중 우호에 흠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처럼 중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서울 사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서울 사태는 바로 오늘날 중국이 지닌 은밀한 난제 중의 하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속담에 “어느 가정이건 읽기 힘든 경전이 있다”는 말이 있다. 겉으론 아무 문제가 없을 듯한 집일지라도 안으로는 저마다 풀기 힘든 난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도 적용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태평스럽기만 한 나라는 없다.

현재 중국은 온갖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내부에서 보면 발등의 불이 번지고 있다. 마치 서커스단의 ‘의자 쌓아 올리기’ 곡예를 보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며 의자들을 쌓아올리다가도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모두 붕괴되고 마는 것처럼, 중국에는 하나 하나가 위기가 될 수 있는 난제들이 계속 축적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은 내부적 위기 때마다 ‘중화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적절히 활용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 당국은 스스로 만들고 키워온 중화주의와 애국주의라는 ‘호랑이 새끼’를 걱정하게 되었다. 실제로 2004년 아시안 게임 때 중·일 축구전과 2005년 상하이 반일 시위가 종국에는 중국 정부에 대한 성토로 비화한 적이 있다. 이후 중국 당국은 목적에 상관 없이 중국인들의 모임이나 결집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모든 점을 종합해볼 때 중국은 무탈한 성화 봉송을 위해 ‘관제동원’을 도모했던 것 같다. 하지만 폭력 사용까지 허용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교적 마찰과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 등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또다시 빗나가게 표출되면서 중국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동원된 사람들을 탓하거나 나몰라라할 수도 없다. 어쨌든 중국 내에서는 ‘애국자’로 취급받는 이들 문제를 ‘해결’하다 자칫 중국 대륙에서 더 큰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이 가장 걱정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중국인의 성화 봉송 시위는,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13억명의 중국을 통치하는 남다른 어려움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효자손’과 같던 민족주의가 어느덧 ‘청년 호랑이’가 되어 중국 정부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중국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 우수근|상하이 둥화대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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