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사설
이명박 정부가 출범 100일 만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 달째 계속된 촛불시위는 진정되기는커녕 갈수록 확산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한겨레>가 벌인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22%에 그쳤으며, <중앙일보> 조사에서는 10%대(19.7%)까지 떨어졌다. 지난 연말 2위 후보를 무려 500만 표 이상 차이로 이기고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국민이 매긴 성적표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임기 후반이 아니라 초반부터 이렇게 민심을 잃은 것은 이명박 정부가 처음이다. 더구나 과거 정부는 국가부도 사태와 친인척 비리, 가벼운 언행 등으로 국민에게 단지 외면받았던 데 비해 이 정부는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는 등 직접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선거로 구성된 민주정부에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천장 없는 기름값 인상에 물가 상승 등 경제도 조짐이 심상찮다. 그럼에도, 뾰족한 경제 살리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의 동의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대북정책도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대통령 국정 철학이 위기 불러
어쩌다가 취임 100일 만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이 대통령의 비뚤어진 국정 철학과 독선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실용의 실체는 공직 윤리나 절차적 민주주의, 공동체 연대, 남북관계 발전 등 그동안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발전시켜 온 소중한 가치들을 짓밟거나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중대한 후퇴다.
이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도덕적인 하자가 명백한 인사들을 ‘공직 수행에 문제될 게 없다’며 내각과 청와대 수석 등에 임명을 강행하고, 헌법이나 법률에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이나 공공기관장 등에 대한 사퇴를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범국민적인 저항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쇠고기 수입 개방도 이 대통령의 철학 없는 실용주의, 민주주의 무시가 초래한 하나의 부산물이다. 실무적인 협상 능력이 모자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경시하는 사고가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쇠고기 문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대운하 문제로 국민과 직접 맞붙었을지도 모른다.
문제의 해법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이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대통령이 먼저 변하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 효율과 실적 지상주의를 버리고,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의 뜻을 섬기는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 먼저다. 그러지 않고서는 언제든지 제2, 3의 쇠고기 파동이 터질 수밖에 없다. 잘못된 철학과 기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 없이 자세만 바짝 낮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된 장관과 청와대 수석 몇몇을 교체하는 미봉책은 더더욱 정답이 될 수 없다.
쇠고기 재협상 등 국민에게 항복해야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의민주주의가 크게 불신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주의를 직접 지키고 확대시킨다는 건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민주정부라면 국민의 행동과 목소리를 소중하고 고맙게 수용해야 한다. 경찰을 앞세워 탄압하거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통령이 직접 시청앞 광장에 나가 국민과 터놓고 대화해야 한다. 원로인사를 청와대로 부르기에 앞서 거리의 직장인, 주부, 중·고생들의 목소리부터 들어야 한다. 이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은 진정성을 믿게 될 것이다.
과거 전두환 독재정권도 국민의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해 6·29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에게 항복한 바 있다. 며칠 전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얘기했듯이 이명박 정부는 국민에게 글자 그대로 항복 선언을 해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에게는 열 번이고 백번이고 져야 한다. 필요하면 대통령 자신을 뺀 나머지는 모두 바꿀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자세라면 쇠고기 문제 해결도 어렵지 않다. 수입 고시를 관보에 게재 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이라도 미국에 추가 협상을 요구하면 된다. 그것이 결국 미국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왜 당당하게 설득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한반도 대운하 추진이나 방송 장악 의도 등 잘못 끼운 단추는 당연히 국민의 뜻에 따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이런 조처는 새 출발의 첫걸음일 뿐이다. 첫 100일 동안의 참혹한 경험에서 참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이 정권의 미래는 없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뢰도 1위' 믿을 수 있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 100일 만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 달째 계속된 촛불시위는 진정되기는커녕 갈수록 확산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한겨레>가 벌인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22%에 그쳤으며, <중앙일보> 조사에서는 10%대(19.7%)까지 떨어졌다. 지난 연말 2위 후보를 무려 500만 표 이상 차이로 이기고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국민이 매긴 성적표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임기 후반이 아니라 초반부터 이렇게 민심을 잃은 것은 이명박 정부가 처음이다. 더구나 과거 정부는 국가부도 사태와 친인척 비리, 가벼운 언행 등으로 국민에게 단지 외면받았던 데 비해 이 정부는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는 등 직접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선거로 구성된 민주정부에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천장 없는 기름값 인상에 물가 상승 등 경제도 조짐이 심상찮다. 그럼에도, 뾰족한 경제 살리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의 동의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대북정책도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대통령 국정 철학이 위기 불러
어쩌다가 취임 100일 만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이 대통령의 비뚤어진 국정 철학과 독선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실용의 실체는 공직 윤리나 절차적 민주주의, 공동체 연대, 남북관계 발전 등 그동안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발전시켜 온 소중한 가치들을 짓밟거나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중대한 후퇴다.
이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도덕적인 하자가 명백한 인사들을 ‘공직 수행에 문제될 게 없다’며 내각과 청와대 수석 등에 임명을 강행하고, 헌법이나 법률에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이나 공공기관장 등에 대한 사퇴를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범국민적인 저항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쇠고기 수입 개방도 이 대통령의 철학 없는 실용주의, 민주주의 무시가 초래한 하나의 부산물이다. 실무적인 협상 능력이 모자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경시하는 사고가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쇠고기 문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대운하 문제로 국민과 직접 맞붙었을지도 모른다.
문제의 해법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이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대통령이 먼저 변하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 효율과 실적 지상주의를 버리고,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의 뜻을 섬기는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 먼저다. 그러지 않고서는 언제든지 제2, 3의 쇠고기 파동이 터질 수밖에 없다. 잘못된 철학과 기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 없이 자세만 바짝 낮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된 장관과 청와대 수석 몇몇을 교체하는 미봉책은 더더욱 정답이 될 수 없다.
쇠고기 재협상 등 국민에게 항복해야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의민주주의가 크게 불신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주의를 직접 지키고 확대시킨다는 건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민주정부라면 국민의 행동과 목소리를 소중하고 고맙게 수용해야 한다. 경찰을 앞세워 탄압하거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통령이 직접 시청앞 광장에 나가 국민과 터놓고 대화해야 한다. 원로인사를 청와대로 부르기에 앞서 거리의 직장인, 주부, 중·고생들의 목소리부터 들어야 한다. 이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은 진정성을 믿게 될 것이다.
과거 전두환 독재정권도 국민의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해 6·29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에게 항복한 바 있다. 며칠 전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얘기했듯이 이명박 정부는 국민에게 글자 그대로 항복 선언을 해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에게는 열 번이고 백번이고 져야 한다. 필요하면 대통령 자신을 뺀 나머지는 모두 바꿀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자세라면 쇠고기 문제 해결도 어렵지 않다. 수입 고시를 관보에 게재 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이라도 미국에 추가 협상을 요구하면 된다. 그것이 결국 미국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왜 당당하게 설득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한반도 대운하 추진이나 방송 장악 의도 등 잘못 끼운 단추는 당연히 국민의 뜻에 따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이런 조처는 새 출발의 첫걸음일 뿐이다. 첫 100일 동안의 참혹한 경험에서 참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이 정권의 미래는 없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뢰도 1위' 믿을 수 있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오피니언(사설,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자메모]‘反촛불 세뇌’ 거꾸로 가는 국방부 시계 (0) | 2008.06.03 |
---|---|
[조선 사설]취임100일, 대통령은 엄중한 상황인식 아래 비상한 결단 내려야 (0) | 2008.06.03 |
[편집국에서] 사장, CEO, 그리고 대통령 (0) | 2008.06.02 |
[사설/5월 31일] 이러고도 '경제 살리기'라 할 수 있나 (0) | 2008.06.02 |
[특파원 칼럼/6월 2일] 한미 FTA 괴담 (0) | 2008.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