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객원논설위원칼럼] 일자리는 과연 최고의 복지인가? / 이태수

설경. 2008. 3. 4. 14:16

[한겨레]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복지가 아니라 더 많은 워크페어(workfare)이다.”(1969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

1968년 시민권을 주창했던 찰스 에버스가 처음 사용한 워크페어라는 단어는 닉슨 대통령이 연방정부 차원에서의 복지개혁을 주창하면서 세간에 자주 인용됐으나 본격적으로 정책에 반영된 것은 90년대가 되어서다. ‘일하라, 그래야 복지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워크페어는 일자리야말로 최고의 복지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제도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 나가자면, 일자리 문제는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문제다. 실업자가 다수 존재할 때 노동의 수요가 많아져 이들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눈부신 경제성장의 결과로 일자리가 수십만, 수백만개 생긴다면, 그리고 복지급여에 의존하고 있는 이들에게 구직정보만 잘 전달된다면 만사형통이 된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당사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면 결코 간단치 않다. 성장은 한다고 하지만 자신에겐 일할 기회가 찾아오지도, 찾아온다 해도 마땅한 일자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일까? 우선은 고용창출의 잠재력이 매우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10억원의 부가가치가 생산될 때 80년대에는 70명이 취업했지만, 2000년대 전반기에는 35명으로 그 절반 수준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8.7%에서 5.4%로 낮아졌으니 일자리 창출의 둔화 속도는 배가된 것이다. 더군다나 창출되는 일자리의 질 또한 명백히 악화되었다. 중간소득계층의 일자리는 없어지고 대신 고소득 아니면 최저소득 중심으로 일자리가 등장하고 있다.

근로자 넷 가운데 한 명은 저임금 근로자로 존재하여 북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심지어 미국보다도 높은 수치다. 또한 일자리가 생겨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며 이들 중 정규직으로 이동한 경우는 열에 한 명꼴이다. 여기에 일자리를 연결해 줄 고용지원센터는 직원 1인당 만명에 가까운 경제활동인구를 담당하고 있으니 맞춤형 고용서비스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런 구조적인 한계를 그대로 두고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내세우는 것은 가진 이들의 오만이요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경제성장의 질과 노동시장의 구조에 대한 혁파 없이, 그리고 촘촘한 학습복지의 실현 없이 공적 부조의 대상자에게 근로가 미덕이라거나 일을 해야 급여가 지속될 수 있다는 강제를 행하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다. 곤궁한 저임금 시장에서 가족과 여가를 팽개치고 밤낮없이 일에만 매달려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우리 시대 가난한 이웃에게 계속 일하지 않으면 복지급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단순히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명제는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될 수 없다. ‘좋고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 구조가 자리 잡고, 국가의 복지급여가 박탈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정도의 수준이 될 때에야 성립할 수 있는 명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명제를 앞세우는 것은 ‘가난은 능력이나 포부가 없는 자의 몫이요, 적자생존이 우리 사회의 덕목이며, 국민 전체의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까지 하다’는 시장주의자의 반복지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새 정부가 내세우는 능동적 복지, 복지병을 없애고 일을 하도록 하겠다는 그 주장에는 이런 위험한 발상이 존재한다.

결단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워크페어가 아니라 더 많은 복지다.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