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입으로는 안빈낙도 강호한정, 마음은 임금 계신 북궐에…
조선 사대부는 자연의 참모습을 보았을까
○ 보편적 생각
→"강과 호수에서 여유를 만끽하며(강호한정), 주어진 분수에 감사하며(안분지족), 가난 속에서 오히려 도를 즐기며(안빈낙도) 유유자적하기."
조선 시가 문학의 백미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많지만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나 정철의 '관동별곡'은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시조나 가사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인 강호한정가에 속하는 것으로, 더러운 세상사를 떠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노래한다. 이들이 동경하는 자연은 붉은 욕망으로 가득 찬 세속과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는 이상향이다. 그들에게 자연은 욕심도 없고 권모술수도 없이 조물주의 섭리에 부합하는 완벽한 무릉도원이다. 그러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다니, 사대부들은 진정 세속의 티끌과는 거리가 먼 자연 그 자체였던 것도 같다.
○ 뒤집어보기 1: 그들은 과연 세속을 버리고 자연을 택했나?
사대부들의 이상이 자연과의 동화에 있었다 하더라도, 과연 모든 사대부들이 세상의 부귀공명과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자연과 부귀공명, 이 둘을 나란히 놓고 하나를 선택한다면 강호한정의 시인들은 역시 자연을 택할 것인가? 정철은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윤선도는?
정철은 자연에 대한 고질적 상사병에도 불구하고, "관찰사를 맡으라"는 임금의 지시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한양으로 갔다가 부임지 관동으로 내달린다. 몸은 자연 속에 깊이 묻혔을지언정 마음이 '콩밭'에 가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만약 자연에게도 심정이 있다면,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세를 향해 달려가는 정철의 배신에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쩌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모태가 된 이현보의 '어부가'에 나오는 화자의 태도는 더욱 가관이다. 강호로 숨어들었던 일부 사대부들에게 자연과 그 속에서의 삶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깃배에 누워 있어도 마음은 고깃배에 없다. 천리 먼 길 떨어진 데다 가 봐야 제 뜻을 펼칠 수도 없는데도, 화자의 마음은 일분일초도 북궐에서 떠나지 못한다. 북궐이야말로 화자가 어디에 있든, 무얼 먹고 무얼 하고 살든 애끓고 가슴앓이하며 오매불망하는 지향점인 것이다.
두 작품을 통해 볼 때 사대부들이 강호한정가라는 '사랑의 찬가'를 바쳤던 대상은 결국 자연이 아니라 속세, 혹은 속세의 권력이었던 것은 아닐까? 또 그들에게 자연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지고지순의 가치라기보다는 속세에서 좌절한 자신의 욕망의 배출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고매한 사대부들에게 지나친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인가?
○ 뒤집어보기 2: 그들은 자연을 제대로 만났나?
여기서 자연은 술잔을 들고 앉아 여유롭게 관조하는 자연이다. 화자에게 아무것도 베풀어주지 않아도 마냥 좋은 자연이다. 또 마치 한 폭의 풍경화에라도 들어간 듯, 흰 갈매기 떼와 어울려 놀 수 있는 자연이다. 강호한정가를 불렀던 사대부들에게 자연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연만 있었을까? 천승세의 '만선'에 나오는 '곰치'의 바다를 보자. 곰치에게 '바다'는 만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사투를 벌여야 하는 대결의 공간이다. 급기야 곰치는 바다로 인해 세 자녀를 잃었고 그 아내는 정신을 놓고야 만다. 이런 곰치의 바다야말로 관조하며 즐기는 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백성들의 자연인 것이다.
강호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속세를 갈망했던 사대부들이 이런 자연의 모습을 놓치거나 외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사대부들이 속세에서 펴고자 했던 큰 뜻이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꿈이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일례로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보길도를 자신의 정원, 아니 왕국으로 꾸미고 싶어 했다. 보길도의 자연물에 온갖 중국 고사를 빗대어 이름을 붙이고는 섬을 자신만의 무릉도원으로 만들어갔다. 그의 후손이 기록한 '보길도지'에 따르면, 윤선도는 정자에서 기생과 악사들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이 노비는 연못 위에서 조각배의 노를 저어야 했고, 그 아비 노비는 겨울이면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 했다.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자연을 노래할 때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또 다른 자연이 펼쳐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강호한정가를 부른 사대부들에게 자연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자연을 사랑했을까? 과연 그들은 자연과 혼연일치되길 원했던 것일까? 오히려 마음은 다른 곳에 둔 채 마치 액자 속 풍경을 보듯 자신이 보고 싶은 자연의 모습에만 몰입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속세의 경쟁에서 밀려난 아픔을 안고 자연의 품에 안겼다가 '거세된 욕망'만 배출하고 속절없이 떠나버린 나그네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들의 강호한정은 올바른 왕도정치와 선정을 추구했던 지식인이라면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어야 할 것, 즉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자연이고 여유가 아니었을까?
조혜윰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전문(全文)과 이에 관한 더 자세한 해설은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안빈낙도 강호한정, 마음은 임금 계신 북궐에…
조선 사대부는 자연의 참모습을 보았을까
○ 보편적 생각
→"강과 호수에서 여유를 만끽하며(강호한정), 주어진 분수에 감사하며(안분지족), 가난 속에서 오히려 도를 즐기며(안빈낙도) 유유자적하기."
조선 시가 문학의 백미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많지만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나 정철의 '관동별곡'은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시조나 가사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인 강호한정가에 속하는 것으로, 더러운 세상사를 떠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노래한다. 이들이 동경하는 자연은 붉은 욕망으로 가득 찬 세속과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는 이상향이다. 그들에게 자연은 욕심도 없고 권모술수도 없이 조물주의 섭리에 부합하는 완벽한 무릉도원이다. 그러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다니, 사대부들은 진정 세속의 티끌과는 거리가 먼 자연 그 자체였던 것도 같다.
○ 뒤집어보기 1: 그들은 과연 세속을 버리고 자연을 택했나?
사대부들의 이상이 자연과의 동화에 있었다 하더라도, 과연 모든 사대부들이 세상의 부귀공명과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자연과 부귀공명, 이 둘을 나란히 놓고 하나를 선택한다면 강호한정의 시인들은 역시 자연을 택할 것인가? 정철은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윤선도는?
정철은 자연에 대한 고질적 상사병에도 불구하고, "관찰사를 맡으라"는 임금의 지시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한양으로 갔다가 부임지 관동으로 내달린다. 몸은 자연 속에 깊이 묻혔을지언정 마음이 '콩밭'에 가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만약 자연에게도 심정이 있다면,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세를 향해 달려가는 정철의 배신에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쩌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모태가 된 이현보의 '어부가'에 나오는 화자의 태도는 더욱 가관이다. 강호로 숨어들었던 일부 사대부들에게 자연과 그 속에서의 삶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깃배에 누워 있어도 마음은 고깃배에 없다. 천리 먼 길 떨어진 데다 가 봐야 제 뜻을 펼칠 수도 없는데도, 화자의 마음은 일분일초도 북궐에서 떠나지 못한다. 북궐이야말로 화자가 어디에 있든, 무얼 먹고 무얼 하고 살든 애끓고 가슴앓이하며 오매불망하는 지향점인 것이다.
두 작품을 통해 볼 때 사대부들이 강호한정가라는 '사랑의 찬가'를 바쳤던 대상은 결국 자연이 아니라 속세, 혹은 속세의 권력이었던 것은 아닐까? 또 그들에게 자연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지고지순의 가치라기보다는 속세에서 좌절한 자신의 욕망의 배출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고매한 사대부들에게 지나친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인가?
○ 뒤집어보기 2: 그들은 자연을 제대로 만났나?
여기서 자연은 술잔을 들고 앉아 여유롭게 관조하는 자연이다. 화자에게 아무것도 베풀어주지 않아도 마냥 좋은 자연이다. 또 마치 한 폭의 풍경화에라도 들어간 듯, 흰 갈매기 떼와 어울려 놀 수 있는 자연이다. 강호한정가를 불렀던 사대부들에게 자연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연만 있었을까? 천승세의 '만선'에 나오는 '곰치'의 바다를 보자. 곰치에게 '바다'는 만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사투를 벌여야 하는 대결의 공간이다. 급기야 곰치는 바다로 인해 세 자녀를 잃었고 그 아내는 정신을 놓고야 만다. 이런 곰치의 바다야말로 관조하며 즐기는 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백성들의 자연인 것이다.
강호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속세를 갈망했던 사대부들이 이런 자연의 모습을 놓치거나 외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사대부들이 속세에서 펴고자 했던 큰 뜻이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꿈이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일례로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보길도를 자신의 정원, 아니 왕국으로 꾸미고 싶어 했다. 보길도의 자연물에 온갖 중국 고사를 빗대어 이름을 붙이고는 섬을 자신만의 무릉도원으로 만들어갔다. 그의 후손이 기록한 '보길도지'에 따르면, 윤선도는 정자에서 기생과 악사들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이 노비는 연못 위에서 조각배의 노를 저어야 했고, 그 아비 노비는 겨울이면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 했다.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자연을 노래할 때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또 다른 자연이 펼쳐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강호한정가를 부른 사대부들에게 자연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들은 자연을 사랑했을까? 과연 그들은 자연과 혼연일치되길 원했던 것일까? 오히려 마음은 다른 곳에 둔 채 마치 액자 속 풍경을 보듯 자신이 보고 싶은 자연의 모습에만 몰입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속세의 경쟁에서 밀려난 아픔을 안고 자연의 품에 안겼다가 '거세된 욕망'만 배출하고 속절없이 떠나버린 나그네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들의 강호한정은 올바른 왕도정치와 선정을 추구했던 지식인이라면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어야 할 것, 즉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자연이고 여유가 아니었을까?
조혜윰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전문(全文)과 이에 관한 더 자세한 해설은 이지논술 홈페이지(easynonsul.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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