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한겨레] 통합논술 교과서/배타적 민족주의 넘어서기

설경. 2008. 4. 9. 15:30
[한겨레] 통합논술 교과서 / (43) 민족이란 무엇인가?
관련 논제 해결하기 / [난이도 수준=고2~고3]

< 논제 > 역사 인식 및 기술과 관련해 제시문에서 공통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민족주의의 면모를 서술하고, 이러한 입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700±50자)

(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족주의는 늘 고대사 속에서 '타 민족에 대한 우리의 영웅적 투쟁'을 부각시킨다. 더군다나 고대사 속의 '타 민족과의 투쟁'의 상대자가 지역 강대국이었다면 "우리가 이겼다!"는 자존심이 오늘날 국가에 대한 존경과 충성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독일 민족주의의 아버지라 할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가 그 명강연인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08)에서 기원후 1∼4세기의 로마제국에 대한 게르만 부족의 항쟁의 의미를 부각시켜 "로마를 물리친 선조 덕분에 우리가 노예적인 로마화의 길을 가지 않고 게르만의 피와 정신의 순수성을 지켜 지금까지 자랑스러운 독일인으로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중략)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 일본 문부성에 의해 '시국 교육 자료'로 분류돼 일역된 것은 1917년이기에, 유럽 언어의 구사 능력이 약했던 신채호가 이를 1900년대에 봤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피히테와 신채호라는 두 명의 거물 민족주의자가 이심전심으로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피히테가 좋아했던 '민족적 자아와 민족적 타자의 사생 대결'의 논리를 신채호도 특히 중국인과 고구려의 관계에 잘 적용시켰다. 신채호에 의하면 "지나족(중국인)이 우리의 신성한 부여족(즉, 한민족)의 영원한 교전 상대였으며, 그 아(我)와 피(彼) 투쟁사의 꽃은 바로 고구려와 지나족 사이의 전쟁들이었다"( < 독사신론 > ㆍ1908). 그 당시 국수주의자를 자칭한 신채호야 고구려와 지나인들의 '사투의 역사'에 주목하고 을지문덕을 한국사상 최고 영웅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기독교적인 온건 민족주의자 함석헌도 고구려가 만주를 장악해 한민족을 '대민족'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중국인에게 패망했다는 것을 한국사의 일대 비극으로 보지 않았던가?(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 ㆍ1934) 그만큼 '고구려사는 중국인과의 항쟁의 역사'라는 등식이 이미 확고해진 것이었다.

남한 최초의 수준급 고대사 개설서인 < 한국사 고대편 > (이병도ㆍ김재원 지음, 1959)도 "고구려의 발전이야말로 주로 한나라 군현과의 투쟁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못박고 있지만, 원래부터 '반침략 민족 투쟁사' 위주로 과거를 정리해온 북한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고구려의 투쟁을 대하는 태도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에 가깝다. (중략)

고구려를 우선적으로 '중국인들과 교전한 나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나중에 고구려의 근거지가 된 예맥의 거주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을 기원전 107년부터 통제하려 했던 것은 한나라 사군 중 하나인 현토군이었으며,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을 요동으로 쫓아낸 것은 나중에 고구려의 건국을 가능케 한 예맥 부족들의 중요한 승리였다. 그 뒤 부여(오늘날 길림 지역)에서 비교적 늦게 이주한 계루(桂婁) 집단이 예맥 계통의 다른 집단들을 누르고 고구려를 건국해 인접 소국들을 부속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것은 역시 중원의 국가들과 요동에 있는 그들의 군현이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전쟁이란 죽임과 약탈만을 의미했던가? 전쟁의 와중에서 특히 솜씨 좋은 수공업자, 기술자들을 노획하는 것은 전쟁의 주된 목적 중 하나였다. 로마제국과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상쟁이 그 접경 지역에서의 '인구 교류'를 의미했듯이, 고구려와 중국 국가들 사이의 전쟁들도 한인(漢人)계 '생구'(生口ㆍ포로)의 대대적인 노획과 고구려에서의 정주를 의미했다. (중략) 고구려와 중국 여러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 치열한 만큼 인구의 상호 교환도, 문화 교류나 무역도 매우 활발했던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동수의 고분이 한나라 벽화고분의 전통을 이어 고구려에 최초로 이식한 것처럼, 중국 귀화인은 특히 고급 문화의 전수에 공을 많이 세웠다. (중략)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역사쓰기란 현재적 선택의 문제다. 타자에 대한 적대성을 부각해 국가주의적 내부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속의 전란들을 민족적으로 해석해 '타 민족과의 영웅적 항쟁'의 역사를 쓸 수 있는가 하면 타자들과의 섞임, 어울림, 교류를 중심에 놓는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국경을 넘는 지역 공동체 만들기를 지향할 수도 있다. 과연 고구려-중국 관계를 정리할 때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해 동북아시아 지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박노자 교수 < 한겨레21 > 2008년 1월 3일 제692호

(나)

(전략)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함축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류 학계나 시민사회의 대응은 우리의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적 전통이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이 이미 독일의 역사를 발명하고 모든 나라의 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학계가 반론으로 제시한 역사적 실체나 진실은 아무리 객관성이나 과학성으로 포장해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 산케이신문 > 이 일본의 우익 수정주의 역사가들에게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본받으라는 사설을 게재했을 때, 이미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대응방식은 사실상 전략적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보다 더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한국 국정교과서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통용될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혹은 그 역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맺고 있는 적대적 공범 관계의 은폐된 현실을 직시한다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민족주의 앞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를 무장해제시킨다는 단순논리는 더 이상 현실의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중국이나 일본의 '국사'가 틀렸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고구려사에 국한해보자면,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무기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말의 여지 없이 당연시되는 '국사'는 일제의 용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민족과 국가를 역사의 주체이자 발전의 정점으로 간주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하는 효과적인 권력의 기제이다.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획일적 '국민' 주체를 만드는 규율 권력의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연대와 평화체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이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되어 있는 한, 역사전쟁은 소재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지현 교수, < 한겨레21 > 2004년 8월 19일 제5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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