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수학 잘하면 이과, 못하면 문과?
인생설계 첫단추 잘못 끼우면 낭패
학교쪽도 일정 맞추려 독촉 말길"
고교 때 하는 문과ㆍ이과 등 계열 선택은 아이들한테 첫 인생설계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결정할 만큼 무거운 선택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그 선택 과정이 너무나 '가볍다'.
경원대 불문과에서 숙명여대 정보과학부로 계열을 바꿔 편입을 했던 이력을 지닌 김세희(29)씨는 그 시기가 "인생을 낭비한 때"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좋은 학교로 옮기고 싶다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뒤늦게 찾은 진로를 고려해 새로 선택한 것이다. 물론 계열을 바꾸면서 상당한 소모전을 치렀다. 마음고생도 고생이지만, 편입 때 반영되는 학점 관리부터 시작해 영어 공부를 다시 하느라 고3처럼 지냈고, 새 계열 공부를 따라가느라 땀을 뺐다. 상당한 돈도 소모했다. 그는 "고교 시절, 문ㆍ이과 선택 때 제대로 된 가이드가 있었다면 이런 낭비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학교에선 수학 점수가 낮으면 문과, 높으면 이과로 결정하면 된다는 식의 상담만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 포털사이트의 수험생 커뮤니티인 '수만휘' 회원들 가운데 고교 2~3학년 학생들이 설명하는 계열 선택 과정은 거의 비슷했다. 경기도의 한 고교 2학년 김아무개(17)양은 '문이과 선택 공지→관련 복사물 나눠줌→상담이 필요하면 상담 뒤 최종 결정' 순으로 "매우 간단하다"고 말했다.
상담이 필요해 교사를 찾아가는 학생도 있지만 대개 실망만 하고 돌아온다. 성적표를 놓고 성적이 높은 분야로 결정하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ㅇ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김아무개 교사(수학 담당)는 "부끄럽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며 "학생에 관한 진로교육 데이터가 있어 이를 참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적성검사지를 제대로 해석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인 성적표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고교에서 문과ㆍ이과 선택은 대개 1학년 2학기 들어가기 전에 이뤄진다. 고교에 진학해 학교생활에 익숙해질 만하면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렇게 재촉하는 이유를 알면 아이들은 분노한다. 대구의 한 여고에 다니는 정아무개(17)양은 "8월 초부터 빨리 선택을 하라고 독촉한 이유가 교과서 주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계열 선택의 중요성이 교과서 주문, 교사 수급, 시간표 정리 등 행정 편의에 밀리는 것이다.
충분한 고민 없이 계열을 선택한 아이들은 1~3학년 때 변경을 요청하지만, 이도 쉽지만은 않다. 때론 계열 변경과 관련해 상담을 요구해도 "이미 다 끝났다"는 식이거나 "귀찮다"는 교사의 태도를 보고 실망만 한다. '수만휘' 회원인 강원도 강릉의 한 여고 최아무개 학생은 "수학에 자신이 없어 문과를 택했다가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어 다시 마음을 잡고 이과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결국 울면서 부탁하니까 인심 쓴다는 태도로 겨우 바꿔줬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계열 선택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한번 잘못 선택하면 제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진로교육 전문업체 와이즈멘토의 조진표 대표는 "문ㆍ이과 선택은 결혼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이 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고 했다. 7차 교육과정에선 전문화ㆍ세분화된 전공 영역별 과목 선택제도를 도입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계열 구분이 더 뚜렷해졌다는 설명이다. 전에는 문과 학생이라도 과학을 한 과목 이상, 이과 학생이라도 사회 가운데 한 과목 이상 반드시 선택해야 했지만 이젠 이과 학생들은 과학만, 문과 학생들은 사회과목만 시험을 치러야 한다.
대학 입학 때 교차지원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대학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학 진학 뒤 편입ㆍ전과도 가능하지만 이 통로 역시 비좁기만 하다. 비동일계열 전과를 허용하는 대학들 가운데에는 학과장 동의서를 받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두거나 결원이 생기는 과에만 전과를 허용하는 곳이 많다.
고교 때 '조급한' 계열 선택 강요는 엄청난 사회적 낭비를 낳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직업진로정보센터 이영대 연구위원은 "2006년 직능원 조사를 보면 편입ㆍ전과ㆍ자퇴를 원하는 대학생들이 34.9%였고, 이 가운데에는 계열 등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다"며 "이렇게 젊은이들의 사회진출이 늦어지는 건 결국 국가경쟁력 낭비"라고 말했다. 서울대 농생대 정철영 교수(산업인력개발학 전공)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문ㆍ이과 계열 결정 시기는 이른 감이 있다"며 "그만큼 현실적으로 진로성숙도가 높지 않으며 적성ㆍ흥미 등의 변화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충분한 진로 지도와 진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느 때보다 진로와 적성이 강조되는 만큼 아이들의 문과ㆍ이과 계열 선택을 무겁게 생각하는 학교의 자세가 요구된다는 얘기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i.co.kr
인생설계 첫단추 잘못 끼우면 낭패
학교쪽도 일정 맞추려 독촉 말길"
고교 때 하는 문과ㆍ이과 등 계열 선택은 아이들한테 첫 인생설계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결정할 만큼 무거운 선택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그 선택 과정이 너무나 '가볍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 포털사이트의 수험생 커뮤니티인 '수만휘' 회원들 가운데 고교 2~3학년 학생들이 설명하는 계열 선택 과정은 거의 비슷했다. 경기도의 한 고교 2학년 김아무개(17)양은 '문이과 선택 공지→관련 복사물 나눠줌→상담이 필요하면 상담 뒤 최종 결정' 순으로 "매우 간단하다"고 말했다.
상담이 필요해 교사를 찾아가는 학생도 있지만 대개 실망만 하고 돌아온다. 성적표를 놓고 성적이 높은 분야로 결정하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ㅇ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김아무개 교사(수학 담당)는 "부끄럽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며 "학생에 관한 진로교육 데이터가 있어 이를 참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적성검사지를 제대로 해석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인 성적표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고교에서 문과ㆍ이과 선택은 대개 1학년 2학기 들어가기 전에 이뤄진다. 고교에 진학해 학교생활에 익숙해질 만하면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렇게 재촉하는 이유를 알면 아이들은 분노한다. 대구의 한 여고에 다니는 정아무개(17)양은 "8월 초부터 빨리 선택을 하라고 독촉한 이유가 교과서 주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계열 선택의 중요성이 교과서 주문, 교사 수급, 시간표 정리 등 행정 편의에 밀리는 것이다.
충분한 고민 없이 계열을 선택한 아이들은 1~3학년 때 변경을 요청하지만, 이도 쉽지만은 않다. 때론 계열 변경과 관련해 상담을 요구해도 "이미 다 끝났다"는 식이거나 "귀찮다"는 교사의 태도를 보고 실망만 한다. '수만휘' 회원인 강원도 강릉의 한 여고 최아무개 학생은 "수학에 자신이 없어 문과를 택했다가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어 다시 마음을 잡고 이과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결국 울면서 부탁하니까 인심 쓴다는 태도로 겨우 바꿔줬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계열 선택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한번 잘못 선택하면 제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진로교육 전문업체 와이즈멘토의 조진표 대표는 "문ㆍ이과 선택은 결혼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이 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고 했다. 7차 교육과정에선 전문화ㆍ세분화된 전공 영역별 과목 선택제도를 도입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계열 구분이 더 뚜렷해졌다는 설명이다. 전에는 문과 학생이라도 과학을 한 과목 이상, 이과 학생이라도 사회 가운데 한 과목 이상 반드시 선택해야 했지만 이젠 이과 학생들은 과학만, 문과 학생들은 사회과목만 시험을 치러야 한다.
대학 입학 때 교차지원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대학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학 진학 뒤 편입ㆍ전과도 가능하지만 이 통로 역시 비좁기만 하다. 비동일계열 전과를 허용하는 대학들 가운데에는 학과장 동의서를 받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두거나 결원이 생기는 과에만 전과를 허용하는 곳이 많다.
고교 때 '조급한' 계열 선택 강요는 엄청난 사회적 낭비를 낳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직업진로정보센터 이영대 연구위원은 "2006년 직능원 조사를 보면 편입ㆍ전과ㆍ자퇴를 원하는 대학생들이 34.9%였고, 이 가운데에는 계열 등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다"며 "이렇게 젊은이들의 사회진출이 늦어지는 건 결국 국가경쟁력 낭비"라고 말했다. 서울대 농생대 정철영 교수(산업인력개발학 전공)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문ㆍ이과 계열 결정 시기는 이른 감이 있다"며 "그만큼 현실적으로 진로성숙도가 높지 않으며 적성ㆍ흥미 등의 변화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충분한 진로 지도와 진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느 때보다 진로와 적성이 강조되는 만큼 아이들의 문과ㆍ이과 계열 선택을 무겁게 생각하는 학교의 자세가 요구된다는 얘기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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