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특검은 두 가지를 밝혀냈다고 했다. 하나는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과 관련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에 이 회장의 승인·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검은 삼성에버랜드 사건에서 전·현직 사장 2명만을 기소하고 삼성SDS 사건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내렸던 검찰 수사 결과를 뒤집었다. 다른 하나는 삼성이 전·현직 임직원 명의로 1199개 차명계좌를 개설해 주식 4조1009억원, 예금 2930억원, 채권 978억원 등 모두 4조5373억원 규모의 재산을 관리해온 것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적발된 차명계좌로는 최대 규모다.
그러나 특검은 정작 그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자금이 어떻게 만들어진 돈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삼성이 계열사 분식회계 등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뒤 이를 차명계좌에 넣어 관리해 왔다는 의혹의 진실 여부는 가려내지 못했다. 특검은 2003년 이전 자금 흐름에 대해선 전표·수표 사본 보존기간 5년이 넘어 추적할 수 없었다면서 '2003년 이후 차명계좌에 지속적으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이유로 비자금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차명계좌 자금은 이 회장이 선대(先代)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라는 삼성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끝까지 계좌추적 등을 통해 진실을 확인하는 대신 삼성 말을 듣고 도중에 수사를 포기한 것이다. 이 회장이 상속받은 '정당한' 재산을 삼성이 왜 계속 차명계좌를 통해 '비밀스럽게' 관리했는지, 또 어떻게 해서 그 재산이 4조5000여 억원 규모로 불어나게 됐는지는 따지지도 않았다. 이에 따라 이 회장 부인 홍라희씨 등도 고가(高價) 해외 미술품을 회사 돈을 빼돌려서 산 것이 아니라 이 회장 개인 재산으로 샀다고 하니 문제 삼을 수 없게 됐다.
특검은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해 "삼성그룹 내에 조직적 인맥관리 체제가 구축돼 로비가 이뤄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면서도 당사자들이 로비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에서 로비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의혹을 제기했던 김용철 변호사 진술이 수시로 바뀌었고,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수사를 중단했다.
당사자가 로비 받은 사실을 시인하고, 로비에 사용한 돈을 회계 장부에까지 기록해 뒀더라면 국민 세금을 들여 특별검사를 임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검이 자신이 직접 돈을 전달했다는 김 변호사 진술은 그냥 흘려 들으면서, 로비 대상으로 지목한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들에 대해서는 아예 소환조사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수사결과를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특검은 이 회장을 비롯한 관련 당사자들을 불구속 기소 처분하면서 수사를 종결 처리해 버렸다. 검찰이 추가 수사에 나설 수 있는 근거를 없애 버린 것이다.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삼성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 왔고 그것이 나라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 사회 각계에서 특검 조기 종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검이 이런 수사결과를 내놓고 "이제 삼성사태에 대한 논란을 끝내자"고 하면 국민들이 과연 고개를 끄덕일까. 많은 국민들은 이번 특검 수사 결과를 접하고 '무능(無能)한 특검, 유능(有能)한 삼성'이란 제목의 연극 한 편을 관람한 기분일 듯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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