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교단일기]촛불 든 아이들과 선생님

설경. 2008. 6. 12. 08:16
아이들이 촛불을 켰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문화제에서 만난 아이들은 평소 교실에서 보던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책상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판치기를 하거나, 귀에 엠피스리를 꽂은 채 짝궁의 책상이 옆으로 쓰러지건 말건 음악만 듣고 있던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노상에서 열심히 종이컵에 양초를 꽂는 일을 돕고, 진지한 얼굴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바로 그 아이들인지 미심쩍을 정도였습니다. 제 것만 알고, 정치에는 무관심한 요즘 청소년들에 대해 우려하는 말이 많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두고 배후가 있다고 합니다. 5월3일, 청계천 촛불 문화제에 참가한 여학생들을 만나 보니 정말 배후가 있긴 있더군요. “우리 동방신기 오빠들한테 나쁜 소고기 먹이지 마세욧!” 동방신기 팬클럽에서 왔다는 소녀들은 동방신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수줍어하면서도 단호하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배후를 밝히라면, ‘동방신기’가 될 듯합니다.

무대에 오른 아이들의 이야기는 미국산 쇠고기를 넘어 평소에 불만을 가졌던 영어몰입교육, 0교시 수업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나름대로 교육 정책에 대해 이리저리 따져보고 있던 것이지요. 실업계에 다닌다는 어느 여학생은 이번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허용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는 무역회계나, 상거래과목 어디에도 없는” 무리한 협상임을 꼬집었고, 오빠가 군대에 갔다는 여학생은 “단체로 급식하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광우병 우려 쇠고기에 대해 불안감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습니다.

개인주의 세태와 부모의 과잉보호 탓에 저밖에 모른다는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보도블록에 떨어진 촛농을 긁어 떼고 있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내 이익이요, 행복이라 여기던 아이들이 집회가 끝난 뒤에 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촛불을 켜며 교실에서보다 더 많은 걸 배운다고 합니다.

10대 청소년이 켠 촛불이 어른들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나온 부모들은, 이번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이번의 촛불집회에 나선 아이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희망을 보았다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군중심리에 들떠 우르르 몰려나가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하는 거라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집회장에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선생님들이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촛불을 켜든 선생님들과, 촛불을 켜는 아이들을 막기 위해 동원된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말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모두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누가 아이들을 위한 선생님인지, 그것은 아이들이 말해 줄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말해줄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켠 촛불이 그들의 가슴을 밝혀 주었는지를.

<이시백|남양주공고 교사·소설가>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