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고전여행]파리대왕

설경. 2008. 10. 9. 11:06

[동아일보]

인간은 내면의 ‘악마적 본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모형은 사람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본보기다. 빌딩을 설계하는 건축가도 미래의 건물 모습을 먼저 축소모형으로 만들어 본다. 루소나 홉스가 ‘자연 상태’를 가상하여 인간 사회를 탐구했듯 우리는 모형을 통해 복잡하게 연관된 사태를 미리 예측하고 체험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모형은 우리에게 우화적 교훈을 들려주기도 한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동물들의 모습을 통해 느리지만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통찰력을 제시한다.

이 책은 외딴 섬에 고립된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년들은 문명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사라진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사회 경험이 적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갈등은 우리 인간 사회의 원초적 모습에 더욱 가깝다.

작가는 소년들이 겪는 갈등과 시련들을 하나의 모형처럼 이야기 속에 투입시켜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우선 이들에겐 하루 빨리 구조되는 것이 시급했다. 불을 피워 구조 신호를 알리는 데 힘을 쏟는 랠프는 소년들 사이에서 대장으로 선출된다. 랠프는 구조선에 희망을 걸고 과일 등 임시로 먹을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 하지만 랠프의 경쟁자인 잭은 구조되는 것보다 섬에 적응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이 크다. 잭이 멧돼지를 사냥하자며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자 집단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갈등이 심화된다.

이상과 현실의 대립으로 보이는 이 경쟁 구도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일부 소년의 상징적 역할이다.

먼저 안경을 낀 뚱뚱한 소년 피기는 소라를 불어 흩어진 아이를 모으고 소라를 가진 사람이 회의에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합리적 규칙을 제안한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늘 비판의 소리를 내고 때로는 군중심리에 휩쓸리는 아이들에게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피기는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인 안경을 가졌다는 점에서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와 지식인의 존재로 비유된다. 평화로운 문명과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이먼의 역할도 의미심장하다. 소년들은 칠흑같이 어둡고 추운 밤이면 알 수 없는 섬의 괴물을 상상하며 공포에 시달린다. 그러나 사이먼은 두려움 없이 숲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내면의 대화를 나눈다. 상상의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멧돼지의 머리 앞에서 사이먼은 ‘파리대왕’의 목소리를 듣는다. “넌 알고 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라는 것을.”

사이먼은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멧돼지의 피에 열광하는 우리 내면의 ‘악’임을 깨닫는다. 인간 내부에 도사린 근원적 공포와 폭력성을 초자연적 대화를 통해 알게 되는 그는 종교적 예지를 상징한다.

‘파리대왕’이라는 제목은 ‘곤충의 왕’을 뜻하는 히랍어에서 비롯됐다. 성경에서도 파괴와 타락을 뜻하는 악마를 가리키는 말로 등장한다. 잭 일당은 진짜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이먼을 죽이고 질서를 강조했던 피기마저 죽인다. 이 과정에서 소년들은 파괴되는 내면의 도덕성을 애써 외면한다. 마침내 잭 일당이 홀로 남겨진 랠프마저 사냥에 나섰을 때 보여준 잔혹함은 자못 충격적이다.

이 책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작가 윌리엄 골딩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고 말했다. 우리 내부에 숨어 있는 악마적 본성을 어찌할 것인가. 전쟁과 범죄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말을 거는 ‘파리대왕’의 경고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권희정 상명대 부속여고 철학 논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