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교과서 뒤집어읽기]강한 남자? 약한 여자?

설경. 2008. 11. 3. 18:36

[동아일보]

사랑의 아픔 삭이는 고전시가의 여성… 정작 작가는 남성

사대부는 왜 실연을 목놓아 울지 못했을까

○생각의 시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답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사실 사랑만큼 사람을 충만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또 사랑이 어긋나는 아픔에 남녀노소 동서고금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실연의 고통이라는 테마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전통적인 정한(情恨)의 여인상’을 축으로 하는 이별시가가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룰 정도인 것을 보면, 우리네에게 사랑은 어쩌면 밥보다 중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뒤집어보기



⑴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리니 내 몸이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이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물하랴. 서러워 생각해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정철, 속미인곡(고등학교 문학)

⑵ …임께서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려 하노라. -정철, 사미인곡(고등학교 문학) 』

우리 고전시가에서 실연의 고통에 아파하는 이가 대체로 여성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랑은 남녀 쌍방이 얽힌 사건이고, 문자 언어의 사용은 지배층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절에 어째서 온갖 이별시의 화자는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을까?

‘강한 남자’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주눅 들어 제 목소리를 감춰야만 했던 당시 남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는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지만, 남자는 강해야 하니까…. 그들은 결국 여성으로 가장해 목 놓아 우는 ‘여장 남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남성 작가들이 그토록 여성 화자를 자주 내세운 것은 역설적으로 스스로가 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으로 봐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 같다.

○현실에서의 여성의 사랑은?

그렇다면 ‘여장 남자’가 아닌 실제 여성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철이 그렸던 선녀처럼 울며 자책하고 참고 기다리는 사랑이었을까? 문자를 사용했던 일부 사대부가나 기방 여성들 외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기층 여성들의 사랑을 들여다보자.



⑴ 고려가요 <만전춘 별사>: 화자는 변심한 임을 원망한다. 임은 물론이거니와 남성들이 원래 살던 여울을 두고 소로 자러 가는 것, 즉 외도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⑵ 민담 <오봉산의 불>: 100일 안에 오봉산을 찾아 불을 붙이면 문둥병에 걸린 남편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전국을 다 뒤지지만 끝내 찾지 못하는 아내. 마지막 100일째 날 지는 해가 너무도 안타까워 해에게 “제발 넘어가지 말라”며 손을 내젓다가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발견한다. 이제 보니 자신의 다섯 손가락이 오봉산이 아닌가. 여인은 당장 기름과 성냥으로 자기 손가락 다섯에 불을 댕겨 남편의 병을 낫게 했다.

⑶ 서사 무가(巫歌) <바리데기>: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부모의 병을 치유할 약을 구하고자 저승 세계도 지나 신선 세계에서 무장신선을 만나 9년 동안 일해 주고 혼인해 아들 일곱을 낳아준다. 그렇게 얻은 불사약으로 이미 죽은 부모를 되살리고 남편과 아들들과 함께 무속의 신으로 남는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중 』

지배층 남성들이 생산했던 문학 작품과 공식 기록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됐지만, 실제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는 이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남성의 사랑을 기다리는 객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인 사랑의 주체로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실현하는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버림받고도 원망도 제대로 못하고 훌쩍거리면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공주’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걸 내던져 사랑하고 쟁취하는 ‘전사’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전통적 여인상의 본질은

자신을 숨겨야 할 정도로 한없이 ‘강함’을 강요받았던 남성들이나, 불보다 뜨거운 정열을 품고도 한없이 ‘약함’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이나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억압당한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성역할의 강요는 인간성의 왜곡을 초래하며, 이는 남녀 모두에게 비애다. 이렇게 보면 고전시가에서 여성들에게 덧씌워졌던 ‘수동적이고 인내하는 정한(情恨)’의 이미지는 오히려 당대 남성 사대부들의 슬픈 자화상에 가깝지 않았을까?

조혜윰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