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갈 길 먼 대한민국 암흑같은 지금 길을 나서야
남보다 앞서 새벽녘에 역사정 기회의 강에 닿을 것"
워싱턴에서 만난 한 한국 인사가 "내가 돈이 아주 많다"면서 지갑을 열었다. 그가 꺼낸 지폐엔 영어로 정확히 '500억 달러'라고 찍혀 있었다. 붉은색 그 지폐는 아프리카 짐바브웨 달러였다. 정기적으로 세계 각국 환율을 게재하는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짐바브웨의 1년 환율변동폭을 찾아보았더니 예상대로 '측정 불가'로 나왔다. 무 한 개 값이 한나절 사이에 몇 백만 달러가 오른다는 짐바브웨의 처지가 '측정 불가'라는 표현에 간단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이 환율표에서 짐바브웨 다음으로 황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라가 불행히도 대한민국이다. 지난 12월 5일까지 1년 사이에 미국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57.7%나 떨어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한국보다 못한 나라는 파산한 아이슬란드와 인도양의 세이셸 군도뿐이다. 우리가 경제규모로 세계 13위가 됐느니 하지만, 딛고 서 있는 땅은 이렇게 불안한 것이 우리 현주소다.
지난 7월 독도 문제로 한·일 갈등이 불거졌을 때 일본 방위성의 한 간부가 "한국의 대외채무가 증가하고 외환보유고는 줄고 있는데 장차 한국에 금융위기가 재발할 경우 우리 국민이 한국을 도와주라고 할지 의문"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현실에 맞지 않는 일본 극단 분자의 협박이라고 생각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진짜로 우리가 외환 부족으로 일본에 손을 내미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우리 밑천을 바로 옆 나라에서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지난 11월 워싱턴 G20 정상회의 때 유럽에선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만 나오면 됐지 한국까지 끼느냐"는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특별한 지원으로 한국은 정말 '겨우' 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오바마 진영의 두뇌라는 브루킹스 연구소는 한국을 뺀 G16 안(案)을 만지고 있다. 그 안에서 기존 G20 국가를 언급할 때도 한국은 맨 꼴찌로 나온다. G20 회의 때 워싱턴에서 만난 우리 외교관은 "국제사회의 눈으로 보면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한국이 제대로 보이기나 하겠느냐. 그나마 반으로 갈라져 있으니…"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국 대신 남아공, 멕시코, 인도네시아, 터키, 이집트, 나이지리아가 G16에 들어 있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보든 국제사회는 그들을 한국보다 더 중요한 나라로 본다. "우리가 경제규모 13위인데 왜 G16에 못 끼느냐"고 해 봤자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다.
워싱턴에서 운전면허 신청 서류에 국적을 'KOREA'라고 썼더니 담당자가 "북이냐, 남이냐"고 물었다. "여기에 북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미국에서 'KOREA'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대부분 북한 때문이니 뭐라 할 일도 아니었다. 한국 의원들이 워싱턴에서 한미 FTA 얘기를 꺼냈을 때 미국 사람들 반응은 "한미 FTA가 잘못됐다"는 것보다 "우리가 지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한국의 국가 중대사라 해도 북핵이 아니면 미국에선 다음도 아닌 그 다음다음의 순서일 뿐이다.
대한민국은 갈 길이 먼 나라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 먼 길에 지금 눈보라까지 치고 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을 일이 아니다. 앞으로 세계에서 무너지는 기업, 산업, 나라들이 속속 나올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기업, 만개하는 산업, 도약하는 나라들도 나오게 된다. 이렇게 세계의 지형(地形)을 바꾸는 소용돌이는 우리와 같은 위치의 나라에게는 가야 할 먼 길을 단축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한 대기업 회장은 "지금의 위기는 큰 시련이지만 어둠이 걷히기만 기다리지 말고 어둠 속에서 길을 떠나 새벽녘에 기회의 강을 건너자"고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해가 다시 중천에 뜨는 때는 언젠가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엔 이미 기회의 강은 닫힌 뒤다. 남보다 앞서 새벽녘에 강에 닿으려면 가장 춥고 칠흑같이 어두운 바로 이때 길을 나서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길 떠날 채비나 제대로 하고 있는 모습인가.
[양상훈·워싱턴 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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