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여적]아버지의 마음

설경. 2008. 12. 9. 20:19


보이지 않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늘 곁에 있어 눈에 익은 것들이 그렇다. 가령 벽에 걸린 그림은 매일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부재(不在)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얼굴은 늘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날 보이지 않으면 비로소 그 존재가 눈에 밟혀 가슴을 치게 된다.

아버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제 위기로 세상이 캄캄해지자 아버지라는 존재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별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한낮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땅의 아버지들은 밤이 되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아버지 신드롬’이 일었던 IMF 이후 십년 만이다. 당시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는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암에 걸려 담담히 삶을 정리해 나가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수많은 아내와 자식과 아버지들의 심금을 울렸다.

요즘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어느 건설사 CF가 호응을 얻고 있다. 광고 카피에 인용된 시는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이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은 이땅의 아저씨들이 아버지로 돌아오는 시간이라고 시는 노래한다.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요, 종교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엔 웃음보다는 시름이 더 많다. 돌아보면 세상은 갈수록 어지럽고, 자식들은 어리기만 하다.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에 뜨거운 것이 맺힌다. 그래서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둠이 짙어져야 별을 볼 수 있고, 바람 부는 밤에는 별빛이 더욱 빛난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의 눈에 별빛이 담기는 것은 세상의 풍파가 그만큼 거세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기엔 바람은 차고 별은 너무 멀다.

<김태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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