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퇴계선생의 인품

설경. 2010. 9. 21. 11:43
퇴계 이황선생은 조선적 주자학을 정착시킨 대유이다. 그는 도를 밝히고 덕을 쌓는 데 일생을 바쳤다. 퇴계가 글을 읽기 시작한 것은 6세부터였다. 처음에는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 천자문 > 을 배웠다.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그 노인 집으로 가서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두어 번 외운 다음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 노인 앞에 공손히 부복해 가르침을 받았다. 12세에 형 이해(李瀣)와 함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 논어 > 를 배웠다. 퇴계는 1권을 마치면 1권을 외우고, 2권을 마치면 2권을 다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자 3-4권을 읽을 때는 간혹 통쾌하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20세 되던 1520년(중종 15)에는 < 주역 > 을 너무 독실히 읽다가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걸려 평생토록 고생했다. 다음 해에 진사 허찬(許瓚)의 딸인 김해 허씨에게 장가를 갔는데, 처가가 영주 부자였으나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

1534년(중종 29) 3월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는데 어머니 춘천 박씨는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현감 이상은 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고 했다. 훌륭한 어머니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승승장구하라고 빌었을 텐데 자제하고 겸손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인지 퇴계는 늘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퇴계는 1544년(중종 39) 중종의 명으로 < 주자대전 > 을 교열할 때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시원해진다"고 하면서 독실히 탐독해 득력한 바가 많았다고 술회했다.

퇴계는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거두어 정돈하고 머리 빗고 옷과 관을 가지런히 갖추어 입고는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다. 때로 조용히 앉아서 사색에 잠길 때는 그 자세가 마치 석고상 같았지만 배우는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탁 트이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아무런 의문이 남지 않도록 했다.

만약 누군가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묻거나 말하지 않아야 마땅한 말을 하면 반드시 얼굴빛을 바르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힘든 듯 하지만, 학문을 논할 때는 시원스럽고 막힘이 없어서 의문 나는 것이 없었다. 몸은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으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흔들림이 없었다.

퇴계는 본성을 잘 지키며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공부에 힘썼다. 특히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엄격했다(신독ㆍ愼獨). 때로는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뜰 때까지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서 스스로의 가다듬었고 활인심방(活人心方)으로 신체를 단련했다.

퇴계는 이익도 온 나라의 이익과 관계가 있는 도의에 맞는 경우에는 취해도 되지만, 이와 반하는 경우에는 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로지 고매한 지식에 대한 견해와 남보다 뛰어난 재주만을 믿고서 한결같이 실속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경계했다. 남의 말을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선현들의 견해도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비평하는 태도를 우려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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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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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늙그막에야 도산에 물러나 숨어산 진성 이공의 묘

 본관 : 진보 또는 진성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지명이다.

           진보성(眞寶城)을 줄여 진성(眞城)이라 부른다

 

 

퇴계(退溪) 선생 묘갈명(墓碣銘)

  - 명문(銘文)은 고봉 기대승이  스스로 짓고 아울러 썼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뭇 비방에서 벗어났네 / 脫略衆訕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 我佩誰玩

내 고인을 생각하니 / 我思故人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 實獲我心

어찌 후세 사람들이 / 寧知來世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랴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구하리 / 復何求兮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곳,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

  • 문화재 : 서원
  • 분류 : 사적 제 170호 (1969. 5. 28)
  • 시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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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Violin Solo & Cha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