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청운고 2학년 학생들이 화학 과목을 PTP(Peer Tutoring Program)로 공부하고 있다. PTP는 동급생 4~5명이 모여 각자 자신이 잘하는 과목에 대해 수업을 해주고 질문에도 답해주는 품앗이식 학습 방식이다.
올 초 2013학년도 대학입시 결과가 발표되자 현대청운고는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였다. 3학년 161명 가운데 서울대 35명을 포함해 연세대 26명, 고려대 17명, KAIST 6명 등 명문대에 줄줄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전국 의·치·한의학계열 합격생만도 65명(중복 합격자 포함)이었다. 중학생 사이에서 “의대 가려면 현대청운고에 가야 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대입 강세 덕분에 입시 경쟁률은 더 치열해졌다. 180명 모집에 434명이 지원해 2.41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2012학년도엔 1.81대 1이었다. 울산에 있는 데다 전교생이 540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가 짧은 기간에 명문고로 도약한 비결은 뭘까. 박규일 교장은 “교사에게는 치열한 경쟁을, 학생에게는 봉사와 나눔을 강조한 덕분”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놨다. 정말 그런 것인지 직접 찾아가 봤다.
수업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 반 학생 20여 명이 우르르 몰려나가 수학교사를 에워쌌다. “선생님, 아까 그 문제는 함수 그래프 말고 도형 원리를 적용해도 답이 나오지 않나요.”
“아까 설명한 공식이 도출되는 원리가 이해가 안 돼요.”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완벽하게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앞다퉈 쏟아냈다. 교사는 그 자리에서 답하거나 학생이 제시한 새로운 풀이방법에 대해서는 노트에 메모하며 “이따 3교시 끝나고 교무실로 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말했다.
다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학생들 질문 공세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다음 수업 교사가 교실 문밖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야 질문을 멈추고 제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현대청운고에선 쉬는 시간마다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 학생에게 둘러싸인 교사가 설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수업 시간인지, 쉬는 시간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전체 학급 인원 30명 중에 쉬는 시간에 화장실이나 매점에 가는 학생은 서너 명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학생이 교사를 붙잡고 질문하거나 자기 자리에서 막간 복습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학교 장민석(2학년)군은 “지난해 막 입학했을 때 이런 열정적 학습 분위기를 보고 엄청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자는 애는 찾아볼 수 없고 선생님이 뭐 하나 설명하면 그 과목 잘하는 친구가 ‘이런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다른 아이디어를 낸다”며 “그럼 반 전체가 그 친구 아이디어를 증명하는 걸로 수업 분위기가 바뀐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죠.”
교사들은 “아이들 열의를 충족시켜 주려면 수업 준비를 게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24년 경력의 박태환 국어교사는 “아직도 수업 들어가기 전에 긴장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머리 좋은 애들이라 교사가 한두 번 답을 못하면 ‘저 선생은 실력 없구나’라고 낙인찍고 더 이상 질문도 안 한다”며 “그게 제일 무섭다”고 했다.
학교 시스템도 교사의 무한경쟁을 부추긴다. 교사의 수업이 얼마나 충실하고 학생을 만족시키는지에 대한 평가지표는 ‘방과후 수업’이다. 박 교장은 “우리 학교 방과후 수업은 학원식”이라며 “교사들이 ‘단과반’을 하나씩 개설한다”고 설명했다.
교사가 자기 이름을 내걸고 방과후 수업 계획을 올리면 학생은 자신이 선호하는 반에 수강 신청을 하는 방식이다. 등록이 저조하면 폐강되고 인기를 끈 반만 수업이 진행된다. 교사들은 “방과후 수업 등록 현황은 교사 자존심과 관련한 문제라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박 교장은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학생들이 교사 실력에 대해 훨씬 날카롭게 평가한다”고 전했다.
이런 학교 분위기 때문인지 현대청운고 교무실은 흡사 독서실 같다. 문용일 교감은 “대다수 교사가 수업 교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밤늦도록 그룹 스터디까지 해가며 엄청나게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현대청운고가 성적에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공부벌레를 양산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학교 측은 학업만큼이나 협업과 봉사에 신경 쓴다. 공부를 할 때도 모둠을 지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있다. 학생들은 주변 중학교 후배들을 위해 일일교사로 나서기도 한다. 또 지원자에 한해 1년에 한 차례씩 충북 음성 꽃동네에 2박3일씩 머물며 봉사한다.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 고등학생들에게 협업과 봉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성을 갖춘 착한 엘리트를 양성하겠다”는 현대청운고의 교육철학 때문이다.
박 교장은 “지적 역량이 뛰어난 학생이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지역사회나 국가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학생들에게 ‘공부는 나중으로 미뤄도 좋지만 봉사할 기회가 생기면 미루지 말고 바로 하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이런 교육철학 덕분인지 현대청운고 학생들은 기부에도 적극적이다. 올 2월 1~2학년 358명이 기아체험에 참여해 한 끼 식사를 포기한 돈 5000원씩을 모아 총 179만원을 월드비전에 기부했다. 또 시조창반 학생들은 ‘전국 정가 경창대회’에 출전해 금상을 받은 뒤 상금 전액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시조창반으로 활동 중인 3학년 최희원양은 “1학년 때부터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걸 직접 보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기부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미술시간에 학생들이 그린 자화상을 학교 벽면에 전시해 둔 모습.
남다른 교육철학과 이렇게 다양하게 잘 짜인 프로그램 덕분에 학생들 모두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최양은 “대학 수시모집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다 보니 지난 3년간 학교에서 정말 다양한 체험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썼다.
“서울에서 여러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 스펙에 비해 화려함은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청운고에서 뛰어난 친구들과 함께 경쟁하고 서로 도우며 공부했던 것, 봉사활동을 통해 느낀 것들은 너무나 소중한 추억입니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고교 시절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게 여러 기회를 열어 준 학교가 자랑스럽습니다.”
2·3학년이 말하는 학교
Q 현대청운고만의 특이한 수업 방식이 있다는데.
A 우리 학교는 나눔과 배려를 강조한다. 생활 속에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대표적인 게 T&L(Teaching and Learning)과 PTP(Peer Tutoring Program)이다. T&L은 선배 한 명이 후배 4~5명을 가르치는 것이고, PTP는 학생 4~5명이 돌아가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거다. 자신이 잘하는 과목은 남에게 가르치고 내가 약한 과목은 친구에게 배우면서 같이 성장할 수 있다.
Q 공부를 같이 하면 쓸데없이 시간을 더 뺏기지 않나.
A 1학년 때는 번거롭고 귀찮았다. 차라리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선배나 친구에게 배우다 보니 학습 내용뿐 아니라 공부 노하우까지 같이 얻을 수 있었다. 1학년 때 물리를 못했는데 2학년 선배와 T&L 을 하면서 필기 요령도 배우고, 선배가 공식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패턴도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후배들과 물리 T&L을 하고 있다.
Q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힘든 점은.
A 워낙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성적 때문에 순간순간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은 ‘지금 친구들은 다 공부하고 있을 텐데’라는 불안감 때문에 힘들다. 특히 1학년 2학기 때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내 공부 리듬을 잃어버려 잠 줄이고 쉬는 시간에도 책만 보면서 무리했는데 성적이 더 떨어졌다. 가족의 위로가 간절했다.
Q 어떻게 극복했나.
A 1학년 때 성적 부침을 몇 차례 겪으며 서너 번 울고 좌절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공부는 내가 중심을 잡아야지, 나를 놓치면 다 끝이라는 것이다. 친구가 어떤 문제집을 푸는지, 성적이 올랐는지 궁금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보지 않고 나에게만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궤도에 올랐다.
Q 성적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한데 동아리 활동 등을 할 짬이 나나.
A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는다고 해서 공부가 잘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동아리를 통해 평소 하고 싶었던 예체능이나 봉사활동을 맘껏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공부에 동기부여가 되는 경우도 많다. 현대청운고의 경우는 학생 1명당 서너 개의 동아리는 기본적으로 하고 있다. 난 시조창반으로 활동하면서 대회에도 많이 나갔다.
Q 서울이나 경기권 자율형사립고에 왜 진학하지 않았나.
A 우리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단지 공부 잘하는 학교가 아니라 남다른 철학이 있다. 지방 도시에 있지만 세계도 품을 수 있는 큰 꿈과 비전을 일깨워준다. 작년 여름방학에는 학교에서 운영하는 GL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포틀랜드 대학에 21일간 해외문화 체험을 다녀오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 수업도 듣고 문화 체험도 하면서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꿈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었다.
Q 현대청운고에 진학하려는 후배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A 공부하려는 의지가 강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다. 급식 먹으려고 줄 서있을 때 한 명도 빠짐없이 단어장 꺼내 외우고 있다. 수업 끝나면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선생님이 교무실에 못 갈 정도다.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공부하고 싶은 학생만 오라고 말하고 싶다.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 평가 핵심은 정주영 철학
“현대청운고 설립 이념은 ‘제2의 정주영 육성’입니다.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인 만큼 학업 능력은 기본이고요.”
조진현 현대청운고 입학관리부장의 설명이다. 현대청운고 입시는 다른 자사고와 마찬가지로 1단계가 서류전형이다. 교과 성적 70%와 교과 외 성적 30%를 합산해 합격자의 1.5배수를 가려낸다. 교과 성적은 현대청운고만의 내신 산출법에 따른다. 국어·영어·수학·과학·사회 다섯 과목만 반영하는데, 중학교 2학년 1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총 3학기 성적만 본다. 교과 외 성적 30%는 출결 10%, 봉사 7.5%, 학교생활기록부 12.5%다.
조 부장은 “매년 ‘중학교에서 전교 몇 % 이내에 들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경쟁률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져 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학교 입시 경쟁률은 2012학년 1.81대 1에서 올해 2.41대 1로 더 치열해졌다. 조 부장은 “지원자가 많아질수록 지원자 점수 분포가 조밀해 0.1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도 한다”며 “면접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는 일이 늘고 있다”고 알려줬다.
1단계 합격자는 현대청운고 홈페이지를 통해 자기개발계획서를 작성해 온라인으로 제출한 뒤 면접시험을 치른다. 조 부장은 “2단계 전형의 핵심은 잠재력과 인성 평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잠재력이란 ‘정주영 철학’이다.
조 부장은 “정주영 철학의 핵심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의식과 창의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약한 엘리트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고 강조했다. 면접 때는 고 정주영 회장이 쓴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나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등 책 내용을 일부 발췌해 관련 내용을 학생에게 묻는다. 조 부장은 “책 속 상황과 맥락을 이해한 후 의견을 말하는 걸 들으면 그 학생의 평소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자기개발계획서에 대한 팁도 알려줬다. 조 부장은 “글을 못 썼다고 감점을 주지 않는다”며 “진정성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교육업체 도움을 받아 글을 매끄럽게 다듬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글=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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