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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10년 만인 1967년 내놓은 용각산은 '이 소리가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광고가 대히트를 치면서 보령제약이 중견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승호 회장은 이날 용각산의 탄생 과정을 설명하면서 용각산이 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기술의 원조라는 이색 주장을 펼쳤다.
"용각산의 가장 큰 특징은 약이 아주 미세한 분말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 없이도 먹을 수 있고 효과도 좋았어요. 요즘 유행하는 나노 기술과 엇비슷한 걸 용각산 제조에 사용한 것이죠."
김 회장은 "용각산 광고를 만들면서 어떻게 하면 이 점을 부각시킬 수 있을지,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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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서른 개 정도의 후보작들을 올려 놓고 보름가량 고민했다.
용각산의 광고 카피는 이런 과정을 거쳐 1973년 탄생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카피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일종의 유행어가 됐다.
시판 초기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진다''일본 약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는 등 온갖 구설수 때문에 기가 죽어 있던 영업 사원들도 활기를 띠었다.
성수동 공장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잔업이 늘고 출하량이 많아지면서 공장을 풀 가동했다.
용각산과 관련해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화는 일본 제조사로부터 기술을 이전받기까지의 과정이라고 김 회장은 소개했다.
"생약 제제에 관심을 가지던 중 일본 제약사 류카쿠산이 개발한 생약제품 용각산을 알게 됐죠. 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경영진을 만나 기술을 이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노(No)'였습니다." 김 회장은 그러나 꼬박 2년에 걸쳐 경영진을 설득했고 결국 기술을 이전받는 데 성공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의약품 제조업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지만,바로 이때부터 보령제약을 국내 대표 제약회사로 키워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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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에는 궁핍을 모르고 자랐으나 양조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6·25전쟁 발발 당시 학병에 자원 입대한 후 장교로 임관,1957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제대 후 종로 5가의 한 허름한 문방구에 약국을 개업했는데 이것이 바로 보령약국이다.
약국 운영으로 자본을 모아 63년 한 제약사를 인수,보령제약을 창업했다.
79년에는 보령메디앙스를 세우고 유아용품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가족으로는 김은선 보령제약 부회장 등 네 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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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다.
3이라는 숫자에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 있다.
세상만사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고,동양 철학에도 음과 양이 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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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라는 숫자가 바로 합을 의미한다."
○기업은 무엇인가
"기업은 곧 사람이다.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신이 없으면 그 기업은 이미 기업으로서의 생명을 잃은 것이다.
기업의 생명력은 바로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런 인간 존중 정신이 보령제약의 창업 철학이자 존재 이유다."
○한.미 FTA에 대한 생각
"제약업계에는 한·미 FTA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글로벌화 개방화를 쫓아가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다.
그걸 못하면 낙오자다.
한국인이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국내 제약사들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기업가 정신이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겠지만 기업가는 특히 기백이 있어야 한다.
한국 사람을 역동적이라고 하는데 그 핵심이 기백이다.
기백과 배짱은 사촌 관계다.
기백은 정확한 거고,배짱은 다소 오차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기백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사회 초년병에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이유 불문하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답게 사는 걸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해 보면 사람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각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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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얘기로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한국 약국의 대명사 '종로 5가 보령약국'을 창업한 회장님께서 약사 면허가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놀라는 사람이 많은데요.(사업얘기를 묻자 김 회장은 "그건 잠깐 기다려봐.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일단 폭탄주부터 한 잔씩 해야지"라며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월급쟁이 약사를 고용했죠."
-다른 일도 많았을텐데,그렇게까지 하면서 약국을 차린 이유가 있나요.
"성장 환경이 영향을 많이 미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큰 형이 동네에 대창약국이란 조그만 약국을 차렸는데,그 이후로 학교가 끝나면 매일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죠.진열대에 놓인 각양각색의 약이 어찌나 신기하던지.그리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 숭문학교에 입학해 서울로 오게 됐는데,그때 내가 거처로 정한 곳도 친척 형이 운영하던 약국 2층의 다다미방이었죠.나중에 백제약국으로 유명해진 종로 5가의 홍성약국이 바로 그곳이에요.
대창약국이 약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줬다면,홍성약국은 약의 의미를 접하게 해준 것이죠."
-말씀을 들어보니 약국 창업이 어렸을 때부터 운명처럼 정해졌다는 느낌이 드네요.
사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사업자금이라고 하니 좀 거창하게 들리네요.
1957년 봄 군대에서 장교로 제대한 후 그 해 가을에 약국 개업을 결심했죠.그런데 변변한 경험도 자본도 없는 상태였어요.
군대에서 모은 돈으로 근근이 마련한 서울 돈암동 집 한 채가 전부였어요.
결혼한 지 채 1년이 안 되는 아내를 설득해 돈암동 집을 팔아 300만환을 마련했지요."
-개업 장소로 종로 5가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300만환을 손에 쥐고 서울 시내 목 좋은 곳을 찾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종로 5가의 한 허름한 문방구에 시선이 멈추더군요.
낡고 볼품없는 건물이었지만 약국 입지로는 그만한 곳이 없다 싶었어요."
-예상이 적중했군요.
"개업 5년 만에 보령약국은 국내 최대 규모 약국으로 성장했어요.
'종로 5가를 지나는 행인 다섯 중 한 명은 보령약국 손님'이란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깐(이 대목에서 김 회장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목소리 톤도 높아졌다).아침이면 보령약국에 약을 사러온 '브로커(약 도매상)'들이 타고온 자전거가 200대가 넘게 세워져 있었죠.어떨 땐 종로 경찰서에서 나와 지도를 할 정도였으니."
-비결이 뭡니까.
"당시엔 도매상들이 약 유통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죠.소매약국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어요.
제약회사들에 현금을 주고 약을 들여오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추고,혹 손님이 찾는 약이 우리 약국에 없으면 자전거를 타고 온 시내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구해줬지요.
이런 자세로 고집스럽게 몇 달 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 얘기는 아니지만 당시 보령약국 근처에 정치깡패 이정재씨가 살았다고 하던데요.
"약국 바로 뒤쪽에 이정재씨 집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다른 건 논외로 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가끔 약국 앞에 지프가 멈춰서면 이정재씨가 차에서 내려 부인과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가곤 했는데,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당시엔 그 광경이 왜 그렇게 멋있게 보였나 몰라."
- 재미있는 일화는 없었나요.
"당시 종로 일대는 완전히 이정재 일파의 세상이었어요.
동대문 시장을 개발한 것도 이정재씨였죠.그런데 이정재씨 꼬붕(부하)들이 밤마다 '술사라''밥사라'하면서 괴롭히기에 한번은 내가 이정재씨가 집으로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갔죠.'웬일이냐' 묻길래 '그냥 놀러왔다' 했지요.
그러고 한참을 있다가 내가 '꼬붕들이 괴롭혀서 못 살겠다'고 하소연했어요.
다음날 되니 날 괴롭히던 놈들이 찾아와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하더군요.
내가 기회를 잘 포착한거죠."
# 연지동 집에 첫 공장 설립
-다시 사업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다 제약회사를 차리는 것도 보기 드문 경우인 것 같은데요.
보령제약 창업을 결심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도매업을 겸하게 된 게 1962년인데,당시 국내 의약품 시장은 과도기였어요.
의약품 국산화 물결이 크게 일기 시작했죠. 반면 국내 대형 도매상이나 약국들은 침체의 늪을 빠져나가기 위한 돌파구를 다각도로 찾고 있었어요.
이런 동향을 지켜보면서 뭔가 전환점을 찾아야겠다는 고민을 했고,그 생각의 끝에는 '의약품 제조업 진출'이라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죠."
- 약을 팔기만 하다가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제는 당시 정부가 의약품 제조업에 대한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약업에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기는 초장부터 난관에 부딪쳤어요.
다행히 부산에 있는 동영제약이란 도산 위기에 빠진 회사가 새 주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인수해 버렸습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한 살 때였지요."
- 창업 초기에는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화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제약회사 사무실은 보령약국 가까이에 마련했는데,문제는 공장이었어요.
변변한 생산품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설 투자를 할 수 없는 노릇이었죠. 돈도 없었고. 고민 끝에 마련한 공장이 바로 연지동에 있는 우리집이었어요.
비록 좁은 집안에다 보잘 것 없는 설비를 갖춘 것에 불과했지만 그 해 겨울 난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 보령제약을 세울 때 이 회사가 앞으로 몇 년 정도 갈 거라고 생각했나요.
"한 1000년은 가야겠다 생각했지요(웃음). 그건 희망 사항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그 때는 먹고 살기 바쁘니깐 어떡하면 밥벌이할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이렇게까지 온 거지. 올해가 50주년인데 앞으로 100주년까지 보령제약이 어떻게 가야 할까,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까,이런 걸 고민하고 있어요.
이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숙제예요."
-중간에 때려치우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상황이 안 좋은 적은 물론 있었죠. 그러나 나에게 당연히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항상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래도 위기라는 생각이 들 때는 있었을 것 같은데요.
"뭐,굳이 꼽으라면 1977년에 안양 공장이 수해를 입었을 때가 아닌가 싶네요.
신축한 지 3년밖에 안 되는 공장이었는데 30년 만에 처음이라는 집중 폭우로 예기치 못한 큰 피해를 입었죠. 값비싼 생산 시설과 제품들은 천장까지 휩쓸고 간 흙탕물로 진흙 범벅이 됐고,전 생산라인이 윗부분만 겨우 보일 정도로 침수됐어요."
-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죠. 200여명의 사원들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재기한다'고 강조했죠. 다행히 직원들뿐 아니라 정부 협력업체 등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일부 도매상들은 선금을 주고 약품을 매입해 줬어요.
전국의 관공서 언론사 금융기관 등에선 연일 성금과 성품을 보내 줬어요.
실로 목이 메이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용각산 겔포스 등 히트 상품이 많은데,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은 뭔가요.
"(한참 고민하더니) 정답을 얘기할까요? 손가락이 열 개죠? 이 중에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나요? 그게 제 답입니다."
# 보령제약에 시집 보낸 큰딸
-개인적인 질문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다소 조심스럽지만,작년 11월에 부인과 사별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가정적인 남편이 못 돼 줬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픈 게 있어요.
요즘도 한 달에 두 번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산소를 찾아갑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김 회장은 이 답변을 하면서 지금까지보다 오히려 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슬하에 따님만 네 분을 두셨는데 혹 아들이 없어서 섭섭했던 적은 없나요.
"(젊은 기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에 아들들이 이렇게 많은데 섭섭할 게 뭐가 있나요."
-장녀 김은선 부회장이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데,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큰 궤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회사에서 일하기 전에 '보령제약에 시집 오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이 점이 중요해요."
-김 부회장의 경영을 100점 만점의 점수로 매긴다면요.
"나는 만점을 주고 싶은데…,이것저것 생각해서 점수를 준다면 51점 정도?. 이 점수도 결코 짠 게 아니에요."
-후한 점수도 아닌 것 같은데요.
"후하지도 않고,짜지도 않아요.
비록 절반을 간신히 넘은 거지만 매사에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로 가는 게 중요해요."
-큰 위기가 닥쳤을 때 김 부회장에게 회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
"가능해요.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굉장히 앞서가고 있어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걸 종종 얘기하거든요.
예컨대 나는 소주밖에 생각 못하는데 은선이는 양주까지 생각하는 식이죠."
정리=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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