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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기제사(忌祭祀)만 열댓번 지내는 마을 일가의 종갓집 장손으로,어릴 적부터 씀씀이의 통이 큰 종손 기질을 키웠다고.
1981년 조선대(무역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1기 육군 학사장교에 지원,육사.ROTC.3군사관학교 출신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는 가운데 동료 학사장교들로부터 '동기회장'으로 뽑히는 등 일찍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1984년 가을 전역한 뒤 미원(현 대상)그룹 공채로 입사,해외곡물수입부.기획부.총무부.영업부 등을 거치며 '야전'과 '기획' 경험을 두루 쌓은 뒤 1995년 제너시스를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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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자리가 잡힌 대기업의 일자리 중 하나에 겨우 겨우 비집고 들어가 안주하며 사느니,아직은 작지만 장차 큰 회사로 키워 보겠다는 비전을 갖고 중소기업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윤 회장은 대기업에 들어갈 기회가 많은 100점짜리 인재보다 자신은 90점짜리지만 "100점짜리 인재들이 오고 싶어하는 기업을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젊은이들이 기업가로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지고 보면 학벌 위주의 한국사회에서 지방대학 수석 졸업생인 윤 회장이야말로 '90점짜리 인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회사를 일군 뒤 '학력'이나 '학벌'보다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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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아띠 사업팀장은 전문대를 중퇴한 사람입니다.
3년 전 그 친구가 제게 메일을 보내 왔는데 구슬김밥사업이 어떤지 제안해 왔어요.
당시 그 친구 나이가 23살이었는데 사업 계획서를 읽어 보니 기획팀에서 한 것보다 내용이 훨씬 나았어요."
윤 회장은 그를 입사시키고,6개월 만에 대리에 앉혀 구슬김밥 사업을 맡겼다.
그는 2년째 사업을 총괄하며 팀장까지 올랐다.
윤 회장은 "탁월한 사업가인 그를 전문대생이라고 거들떠도 안봤다면 구슬김밥 사업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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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연초가 되면 사람들은 이런 저런 결심을 합니다.
월급쟁이들은 한 번쯤 "까짓것,내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회장님은 한마디로 '부러운 사람'이지요.
"하하,초장부터 이렇게 말씀드리면 밋밋할지 모르겠는데,저는 어릴 적부터 기업인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고 싶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내 회사'를 욕심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죠."
# 책가방·운동화가 맺어준 결심
-왜 하필 기업인이었죠? 당시 시골 아이들은 흔히 4성 장군,판·검사,정치가,뭐 이런 게 장래 희망이었지 않았습니까.
(윤 회장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전남 순천의 오지마을,풍덕동에서 낳고 자랐다)
"제겐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릴 적 학교까지 왕복 몇 십리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책과 공책,연필 등을 보자기로 싸 허리에 동여매고,고무신을 신고 통학했지요.
그런데 순천 시내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느날 '선물이다' 하시며 책가방과 운동화를 건네주시더군요.
그때의 환희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방과 운동화에 반해서 기업인이 되기를 결심했다는 건가요?
"그렇죠.매끈한 가방과 튼튼한 운동화,이런 걸 누가 만드는지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기업에서 만드는 거란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곧바로 결심했지요.
나도 크면 사람들에게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기업에 들어가,가능하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런데 사회생활은 식품회사인 미원(현 대상그룹)에서 시작하셨습니다.
"1984년 학사장교를 마치고 몇 군데 대기업에 지원했는데,사실 미원 외에도 다른 대기업에도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천하의 삼성(제일제당)과 '조미료 전쟁'을 벌여 한 번도 1등을 내주지 않은 미원에 마음이 끌렸지요.
제 고향인 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고."
-당시는 2차 오일쇼크 직후라 취업문이 여간 좁지 않았을 텐데 선택의 즐거운 고민까지! 요즘 '이태백(태반이 백수 신세인 20대)'들이 들으면 여간 부러운 얘기가 아니겠습니다.
"글쎄요,두드리면 열리는 법 아닙니까.
학사장교 1기였던 저는 1984년 9월 제대를 앞두고 취직을 준비했는데,취업 시즌이 아니어서 공채시험을 보는 회사가 한 군데도 없더군요.
동기 회장을 맡고 있던 제가 '총대'를 메기로 결심하고 동기생들 중에서 취업 희망자를 끌어모았습니다.
모두 430명에 이르더군요.
그들의 이력서를 하나의 자료로 만들어 현대,삼성 등 주요 그룹 인사담당자에게 돌리고 특별 전형을 해 달라고 요구했죠.우리가 1기생이라 당시 기업들에 '학사장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는데,발품과 손품을 판 덕분에 길을 뚫어낸 셈이죠.지금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만,지원자 전원이 다들 합격했습니다."
# 월급쟁이에서 회장으로
-터놓고 여쭙겠습니다.
윤 회장께서는 지방대학(조선대 무역학과) 출신이신데,그로 인한 차별이랄까 서러움을 겪은 적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조선대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지원해 합격했고,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데다 군복무를 장교로 했는데도 사회에 나와 보니 서울의 명문대 꼴찌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지요.
신입사원 시절부터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라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다섯 배는 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미원에 끝까지 남아 있지 못하고 따로 나와 독립하셨습니다. 지방대학 출신에 대한 차별의 벽 때문이었습니까?
"그것만은 아닙니다.
미원의 닭고기 가공 자회사인 마니커의 영업부장으로 발령받아 일을 하다,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됐던 거죠.그래서 회사에 건의했는데,사업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더군요.
대기업이 영세 자영업자들의 터전이던 소형 치킨점 사업에 뛰어드는 것도 이미지에 좋지 않고,당시 치킨 프랜차이즈만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 전형적인 '레드 오션' 분야라는 것도 사업 진출을 망설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윤 회장께서는 무슨 배짱으로 사업 성공을 자신한 것입니까.
"남들은 레드 오션이라고 봤을지 모르지만,제게는 요즘 유행하는 '블루 오션'으로 눈에 확 들어왔지요.
당시 치킨집들은 대부분 술을 팔면서 안주로 치킨을 파는 호프집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착안한 게 '닭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계층인 주부와 어린이들이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메뉴를 즐길 수 있게 완전히 차별화하면 새로운 개념의 새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아이디어는 그렇다 치고,창업자금은 있었습니까?
"사실 수중에 돈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죠.자본금 5억원을 조달해야 했는데 그 중 내 돈은 2000만원뿐이었거든요.
전셋집을 월세로 바꿔 5000만원을 더 만들었고,나머지 4억3000만원은 주변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았죠.다행히 친구나 선·후배들이 한 사람당 1000만~3000만원 정도씩 잃는 셈치고 투자해 줬습니다.
그냥 윤홍근이가 뭐 좀 해본다니까 떼여도 좋다는 심정으로 건네준 것입니다."
-치열한 인생이 시작된 거군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하시죠.(다들 잔을 들고 있을 무렵 제너시스BBQ 직원들이 제본기를 막 빠져 나온 윤 회장의 저서 'BBQ 원칙의 승리'라는 책을 가져왔다.
윤 회장은 곧 정식 출간을 앞둔 이 책 한 권 한 권에 손수 사인을 해 동석한 기자들에게 선물했다)
-새해 첫 선물로 의미있는 책을 받았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어떤 것입니까?
"제목 그대로 '원칙을 지키면 결국은 이긴다'는 거죠.치킨업계 최초로 닭을 튀길 때 프라잉 오일보다 원가가 여섯 배 이상 비싼 최고급 올리브유를 썼을 당시 회사 내부에서조차 과도한 원가 부담을 안긴다며 반대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전 세계 외식업체들이 건강을 해치는 트랜스지방을 조리용 기름으로 사용해 홍역을 치르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의 이익보다는 소비자 편에 서서 긴 안목의 원칙을 지킨 게 결국은 기업도 살리고,가맹점도 살리고,소비자도 안전하게 해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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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3년도 안돼 맞은 외환위기의 고비는 어떻게 넘기셨습니까.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줄임말 아닙니까.
위기 국면에서 상황을 정면으로 보면 빨려 들어갈 수 있지만,그 뒷모습에는 언제나 기회의 얼굴이 숨어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역발상으로 그 위기를 오히려 활용했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계가 대부분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위기였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외식하던 습관은 한 번 들이면 못 끊는다.
그렇다면 외식 금액을 낮출 것이다.
쇠고기 등심을 배부르게 먹던 집이 돼지고기 삼겹살로,그래도 어려우면 4인 가족이 만원이면 해결되는 치킨으로 옮겨올 것이다'라고요.
이런 예측 아래 역발상으로 남들이 줄이기에 바빴던 언론 광고를 대대적으로 늘렸고,덕분에 BBQ는 가장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지요."
# 기업가론
-사표로 삼는 기업인은 누굽니까.
"정주영 이병철 이건희 이 세 분을 존경합니다.
기업가로서 기업을 키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분들이었기 때문이죠.잠시 고 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눈을 돌리긴 했지만 그 역시 기업인으로서 국가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작용한 결과라고 봐요.
이병철 회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일류경영,계획경영,인재경영 등을 실천한 분이죠.이건희 회장은 선대 회장께서 작심하고 '만들어낸 천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재벌의 경영권 대물림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있지만,이 회장은 '준비된 오너 경영인'의 전형을 전 세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분들이 창업하고 키운 삼성을 뛰어넘을 때까지 삼성을 배울 겁니다."
# 금전론·학벌론
-월급쟁이들이 기업 오너를 부러워 하는 것 중 하나는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글쎄요.
돈에 대해선 일반인들보다 자유롭겠지만,함부로 쓰지는 못해요.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펑펑 써보고 싶은 욕심 같은 것도 없지만.일정 금액 이상은 제 돈이 아니라 만인(萬人)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너시스BBQ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것도 회사 구성원들과 가맹점주들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지 대주주인 제가 돈을 갖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지갑 좀 보여주세요.
"(웃으며) 저 돈 별로 없는데 (돈을 꺼내려다 가족들 사진이 튀어 나와 술상에 떨어졌다.
윤 회장은 먼저 사진을 집어 다시 지갑에 정성스럽게 넣은 뒤 1만원짜리 신권 다발 50장가량을 꺼내 보여줬다) 현금은 신권으로 50만원 정도 넣고 다니고요,신용카드도 몇 장 있습니다."
-신권만 가지고 다니는 특별한 이유라도?
"깨끗한 돈을 건네는 것은 받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제 나름대로의 철학입니다.
돈을 아껴서 다뤄야 돈을 벌 수 있는 법이지요."
# 인간 윤홍근
-사업가로 변신해 기업경영에선 큰 성공을 일구셨는데,'가정 경영'은 스스로 몇 점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일과 회사에만 빠져 살아왔으니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제 아내는 그런데도 한 번의 불편한 내색 없이 잘 살아줬어요.
미원 근무시절,아내는 늦게 들어오는 저를 회사 앞에서 아이들을 차에 태워 놀리며 기다리다가 새벽 1시에 함께 귀가했던 적도 있었지요."
-창업 결심했을 때 부인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창업할 때 용기를 많이 줬죠.독립해서 내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아내는 '당신 뜻대로 하세요.
그 대신 나와 함께 새벽 기도 2개월만 나가 주세요'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꼬박 두 달 동안 새벽기도를 했는데,부부 금실이 덤으로 주어졌습니다."
-즐겨 부르는 애창곡은?
"정미조씨의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새부엉이의 '호수에 잠긴 달' 정도? 노래 부르는 걸 엄청 좋아하는데 많이 부를 기회가 없어 스트레스를 받아요."
-7080 이전의 노래들이군요.
젊은 직원들과 어울리는 데 무리는 없습니까?
"제가 2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HOT(90년대 인기 아이돌그룹)'는 존재하지 않았을 걸요.
(좌중 웃음) 제가 춤의 달인이거든요.
요즘 젊은 사원들도 제가 춤 한번 보여주면 모두 깜빡 죽습니다.
어머니 태몽이 '춤추는 닭'이었는데,닭 사업 안했으면 춤추는 길로 갔을지도 몰라요."
-처음 골프를 칠 때 연습 없이 바로 필드에 나갔다고 하던데,무엇이든 자수성가형인 모양입니다.
"제가 학습 능력은 남들보다 좀 뛰어난 것 같아요.
동반자의 '원 포인트' 코치를 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골프 좌우명이 '다타호신(多打好身) 소타호심(少打好心)'이라는 겁니다.
잘 맞으면 잘 맞는 대로,못 맞으면 못 맞는 대로 상황을 즐기지요.
그러다 보니 필드 나가는 게 부담이 없고 연습장에서 100번 연습하는 것보다 실력이 빨리 늘더군요.
요즘 스코어는 진폭이 좀 있는 편이지만,그런대로 80대는 유지합니다."
-오너로서 스트레스가 월급쟁이보다 훨씬 많을 텐데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스트레스 풀려고 마시는 술이 가장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조건 집으로 가 이불 펴고 잡니다.
48시간을 꼬박 잔 적도 있어요.
곁에서 보기에 혼수상태에 빠져든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깨고 나선 스트레스 받던 일을 깨끗이 털어버립니다."
# 앞으로의 사업계획
-오너가 부러운 것 중 또 하나는 정년이 없다는 겁니다.
"전 아직까지 경영을 놔 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도 정년을 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곳이 우리 회사입니다.
지난해까지 'CQO(Chief Quality Officer·최고품질책임자)'를 맡았던 고문도 67세입니다."
-앞으로 어떤 회사를 만드실 계획인가요?
"'세계 최고 프랜차이즈 제국'을 건설하는 게 제 꿈입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프랜차이즈 기업'을 만들자였는데 오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단어를 바꿨어요.
천년 불멸의 제국을 만들자는 다짐을 제 스스로도 한번 더 해본 거죠.2020년까지 전 세계 5만개 사업장을 일으켜 맥도날드를 따라잡고,이들 점포가 모두 성공하는 그날이 바로 우리 제너시스BBQ가 제국으로 출발하는 날입니다."
-사주팔자를 보면서 한 해 운수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은데,크리스천인 윤 회장께서는 운명이나 하늘의 뜻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 좌우명이자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바로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입니다.
저는 월급쟁이 시절부터 '내가 곧 사장이다'라는 생각으로 일했고,그랬기에 기업가로의 변신 기회도 포착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정리=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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