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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아침] 불신풍조 더 못키워 안달인가

설경. 2007. 9. 17. 00:38
세계적인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트러스트(Trust)'라는 저서를 통해 사회적 신뢰가 국가 발전에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역설한 게 벌써 오래전 일이다. 거래 비용을 줄임으로써 경제 효율성을 높여주는 경제적 자산임을 강조한 말이다.

후쿠야마 교수의 견해는 직관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거래 당사자들이 서로 믿을 수 있다면 구두 계약으로 끝날 일도 믿지 못하면 계약을 확실히 이행시키기 위한 여러 복잡한 절차가 요구되게 마련이다. 이는 불가피하게 거래 비용을 키워 그런 비용이 없거나 적다면 이루어졌을 거래를 아예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그만큼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경제학에서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라고 불리는 현상은 불신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는 두 명의 죄수가 각각 분리되어 조사를 받는데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모두 석방되고, 한 사람만 자백하면 그는 가벼운 처벌을 받되 다른 사람이 엄한 처벌을, 둘 다 자백하면 앞서 자백하지 않은 한 사람이 받는 처벌보다는 약하지만 모두 처벌받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현실은 두 사람 모두 자백하는 쪽을 선택하고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 자신만 엄한 처벌을 받는 위험을 피하려다 보니 결국 둘 모두 감옥행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이 서로 완벽하게 신뢰한다면 둘 모두 석방되는 최상의 결과를 얻지 않았겠는가.

우리나라의 사회적 신뢰가 높은 편에 속한다고 볼 국민은 아마 많지 않을 듯하다. 후쿠야먀 교수도 저서에서 한국을 '저신뢰 국가'로 분류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국제학을 연구하는 로런스 해리슨 교수와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의 공동조사도 아쉽지만 유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조사에서 노르웨이는 국민의 65%가 상호 신뢰한다고 답해 세계 최고로 나타났고 스웨덴도 60%로 매우 높았다. 반면 남미의 브라질과 페루는 각각 3%로 5%로 최하위권이었다. 한국은 30% 정도여서 세계적으로는 중간 수준이지만 일본은 물론 중국ㆍ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낮았다.

후쿠야먀 교수의 저서와 해리슨ㆍ헌팅턴 교수의 연구결과가 나온 게 여러 해 전이라고 해서 그 사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적 신뢰는 결코 단기간에 축적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데 국민 모두 힘을 합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되레 불신 풍조를 키우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특히 요즘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신정아 씨 사건은 압권이라고 볼 수 있다. 온통 거짓말로 일관한 당사자 신씨야 더 말할 것이 없지만 변양균 청와대 전 정책실장도 거짓말 솜씨가 그 못지않다. 신씨와 개인적 친분이 없다더니 수년 전부터 깊은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물심양면으로 신씨를 지원하며 비호해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변 실장의 거짓말에 청와대 대변인과 대통령까지 넘어가 그를 감쌀 정도였으니 국민의 불신만 키운 꼴이다.

불신은 근거 없는 의혹을 확산시키는 기름진 토양이 되기 십상이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일단 유포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대중의 믿음 탓에 좀처럼 쉽게 사드라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돼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다.

언로(言路)가 차단되면 유언비어가 더 기승을 부림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숱하게 경험했던 바다. 정보가 물 흐르듯 막힘 없이 흘러야 사회적 신뢰가 커지고 터무니없는 의혹도 뿌리내리기 어렵게 된다.

그럼에도 참여정부가 언로를 막지 못해 안달인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로 인해 불신을 키우고 각종 의혹이 번성하면 정권 차원만이 아닌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결코 득될 게 없음을 모른단 말인가.

[성철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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