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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모 일간지는 ‘한국 민족주의의 대전환’이라는 기획기사에서 20년간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죄파 민족주의가 몰락하고 우리 사회가 포스트 386세대의 등장과 함께 우파 탈민족주의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좌파 민족주의가 쇠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민족주체성과 통일에만 집착할 뿐 선진사회로 가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좌파 민족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통일지상주의로 비친다. 통일지상주의는 통일은 너무나 숭고한 목적이기 때문에 그 통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상관없으며, 어떤 수단 방법이든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가 이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그렇지만 이런 통일 지상주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민족의 통일이 우리의 중차대한 과제이긴 해도 개인의 자유와 인권과 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까지 포기하면서 추구할 수는 없다. 또한 한 민족 전체가 후진사회로 전락하고마는 잘못된 체제로의 통일을 바랄 수도 없다. 통일이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가로막는다면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통일은 오히려 민족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닫힌 민족주의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좌파 민족주의의 위험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아예 민족주의를 송두리째 내팽개치는 탈민족주의를 주장한다. 이들은 민족이란 근대사회가 만들어 낸 허구적 신화며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바뀌는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는 좌파든 우파든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정당화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민족은 단순한 허구적 공동체가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장하듯이 민족이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면 팔레스타인 민족이나 쿠르드 민족이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현실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민족은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계화의 시대라 해도 민족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가 없다. 정체성의 상실은 뿌리를 잘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가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하는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민족의 통일은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과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열린 민족주의가 우리의 새로운 이념적 좌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열린 민족주의는 민족의 통일과 정체성을 배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틀 속에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 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화를 역사가 통합되어가는 불가피하고 거스를 수 없는 인류 보편사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세계 보편적 기준에 우리를 맞추면서 동시에 민족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한구(성균관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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