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남 KAIST 전자전산학과 석좌교수
중학교 때 영문법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때 배운 가정법(假定法)은 왠지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써먹고 싶은 마음에 `If I were a bird, I would fly to you.'라는 문장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인데, 가정법의 세계에서 멋대로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면서 가정(假定)이란 말의 쓰임새도 여러 가지여서 함부로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수학의 정리(定理)는 가정이라는 전제조건에 기반한 수학적 사실을 기술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공학을 배우면서 현실 세계를 대상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현할 때 목적에 적합한 가정을 세운 후 이로부터 방정식을 얻고 해석하는 과정이 거의 필수 단계라는 것도 알게 됐다.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우주선 로켓 폭파사고는 측정단위에 대한 잘못된 가정으로 단번에 수십억달러를 날린 경우로 값비싼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명제나 주장은 대부분 어떤 형태든 가정이라는 전제조건 아래서 참(眞)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전제조건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언급하고 단도직입으로 결론을 말한다. `빨리 빨리' 문화의 선봉장들은 앞뒤 정황 설명 없이 간결하게 강력한 주장을 말하는 사람에게 말을 잘한다고 하고, 밑도 끝도 없이 큰 것을 말하는 사람을 통이 큰 사람이라고 우러러보는 경향도 있다. 반면에 차근차근히 조건을 들어가며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말이 많다', `쩨쩨한 사람이다' 하며 폄하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전제조건을 얼버무리고 주장과 결론에 무게를 두어 말하면서 스스로는 참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때 듣는 사람이 이해를 못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핀잔한다. 반대의 경우도 심각하다. 전제조건은 대충 듣고 머리에 각인된 결론 부분에서 제멋대로 가정 또는 전제조건을 추정해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녀가 중매로 만나 짧은 시간에 결혼을 결정할 때 자칫 쉽게 파경에 이르는 경우를 보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말한 주장이나 제공된 정보에 대해 잘 따져보거나 이해하지 않고 멋대로 가정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가볍게 다루는 우리의 의사소통법은 바뀌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그런 우리 방식이 잘 통하지 않을뿐더러 앞으로 우리나라가 3만불 시대를 열려면 더더욱 그렇다. 효율면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 총생산(GDP)를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가 세계퍼지학회(IFSA)에서 처음 한국학회 대표이사로 시작해 2년 전 학회장으로 임기를 마칠 때까지 10여년 봉사하면서, 또 여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외국인들과 대화를 해보면서, 여러 대화법을 경험했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서 서툰 영어를 하더라도 서구 사람들은 참 말을 많이 한다. 처음에는 무슨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을까 의아했는데, 듣고 보니 대부분 자기 주장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여러 전제조건이나 여건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또 듣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면서 필요하면 반복했던 얘기를 조금 바꾸어 다시 말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 취급하는 `신정아 사건'을 보면서,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따지는 사람이 있어 신씨의 학력위조 혐의가 드러났다는 점이 반가웠다. 그러나 자주 앞뒤 연결 없이 겉으로 나타난 사항만 크게 쓰는 신문이 많은 독자에게 잘못된 가정(假定)이나 상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해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이는 국력인 국민의 시간이라는 자원을 쓸데없이 소모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떤 명제든 그 명제가 주장하는 결과는 가정을 전제로 해 논리적으로 설명될 때 참이 된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여서 복잡한 문제에 대한 정보나 주장은 정황이나 전제조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이공계 교육을 받은 필자는 명제와 가정, 결론부를 따지는 것이 습관이 됐다. 일상 대화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어떤 가정에서 저런 주장을 하는가 따져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비록 시원시원하거나 통이 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못할지언정, 요새 신문지상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이들처럼 결정적으로 예상 밖 어긋나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이공계 사람들의 사고와 대화방식이 교과서 밖을 나와 우리 일반인과 일상생활에도 자연스러운 의사소통법으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 모바일로 보는 디지털타임스 3553+NATE/magicⓝ/ez-i >
중학교 때 영문법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때 배운 가정법(假定法)은 왠지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써먹고 싶은 마음에 `If I were a bird, I would fly to you.'라는 문장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인데, 가정법의 세계에서 멋대로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면서 가정(假定)이란 말의 쓰임새도 여러 가지여서 함부로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수학의 정리(定理)는 가정이라는 전제조건에 기반한 수학적 사실을 기술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공학을 배우면서 현실 세계를 대상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현할 때 목적에 적합한 가정을 세운 후 이로부터 방정식을 얻고 해석하는 과정이 거의 필수 단계라는 것도 알게 됐다.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우주선 로켓 폭파사고는 측정단위에 대한 잘못된 가정으로 단번에 수십억달러를 날린 경우로 값비싼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명제나 주장은 대부분 어떤 형태든 가정이라는 전제조건 아래서 참(眞)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전제조건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언급하고 단도직입으로 결론을 말한다. `빨리 빨리' 문화의 선봉장들은 앞뒤 정황 설명 없이 간결하게 강력한 주장을 말하는 사람에게 말을 잘한다고 하고, 밑도 끝도 없이 큰 것을 말하는 사람을 통이 큰 사람이라고 우러러보는 경향도 있다. 반면에 차근차근히 조건을 들어가며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말이 많다', `쩨쩨한 사람이다' 하며 폄하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전제조건을 얼버무리고 주장과 결론에 무게를 두어 말하면서 스스로는 참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때 듣는 사람이 이해를 못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핀잔한다. 반대의 경우도 심각하다. 전제조건은 대충 듣고 머리에 각인된 결론 부분에서 제멋대로 가정 또는 전제조건을 추정해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녀가 중매로 만나 짧은 시간에 결혼을 결정할 때 자칫 쉽게 파경에 이르는 경우를 보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말한 주장이나 제공된 정보에 대해 잘 따져보거나 이해하지 않고 멋대로 가정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가볍게 다루는 우리의 의사소통법은 바뀌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그런 우리 방식이 잘 통하지 않을뿐더러 앞으로 우리나라가 3만불 시대를 열려면 더더욱 그렇다. 효율면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 총생산(GDP)를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가 세계퍼지학회(IFSA)에서 처음 한국학회 대표이사로 시작해 2년 전 학회장으로 임기를 마칠 때까지 10여년 봉사하면서, 또 여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외국인들과 대화를 해보면서, 여러 대화법을 경험했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서 서툰 영어를 하더라도 서구 사람들은 참 말을 많이 한다. 처음에는 무슨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을까 의아했는데, 듣고 보니 대부분 자기 주장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여러 전제조건이나 여건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또 듣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면서 필요하면 반복했던 얘기를 조금 바꾸어 다시 말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 취급하는 `신정아 사건'을 보면서,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따지는 사람이 있어 신씨의 학력위조 혐의가 드러났다는 점이 반가웠다. 그러나 자주 앞뒤 연결 없이 겉으로 나타난 사항만 크게 쓰는 신문이 많은 독자에게 잘못된 가정(假定)이나 상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해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이는 국력인 국민의 시간이라는 자원을 쓸데없이 소모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떤 명제든 그 명제가 주장하는 결과는 가정을 전제로 해 논리적으로 설명될 때 참이 된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여서 복잡한 문제에 대한 정보나 주장은 정황이나 전제조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이공계 교육을 받은 필자는 명제와 가정, 결론부를 따지는 것이 습관이 됐다. 일상 대화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어떤 가정에서 저런 주장을 하는가 따져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비록 시원시원하거나 통이 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못할지언정, 요새 신문지상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이들처럼 결정적으로 예상 밖 어긋나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이공계 사람들의 사고와 대화방식이 교과서 밖을 나와 우리 일반인과 일상생활에도 자연스러운 의사소통법으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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