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정조 대왕 풍자소설 억압한 보수주의자였다

설경. 2008. 2. 28. 12:56


박남일 자유기고가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정조 대왕

지난 몇 년 사이에 정조는 책과 영상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에게는 '개혁군주', 또는 '성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인 정조의 내면을 파헤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그는 죽은 지 200년 만에 후손들의 문화 콘텐츠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논란이 불거졌다. 정조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임금이 된 무렵에 조선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었다. 붕당의 폐단으로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지만, 병자호란 이후 싹튼 자주의식에 덧붙여, '북학'과 '서학' 등의 외래 학문이 밀려올 무렵이었다. 때맞춰 임금이 된 정조는, 왕권과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우선 각 붕당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다. 그것은 '이열치열' 전술이었다. 붕당 간의 정쟁에서 왕 자신이 심판관이 된 것이다.

한편 정조는 이른바 '문풍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이를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고, 37세 이하의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뽑아 교육을 시켰다. 그것이 바로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다. 정조는 매달 20일경에 규장각에 나가 직접 강의를 하고, 시험도 실시했다. 그러면서 초계문신들을 친위 세력으로 포섭한다. 그 결과 19세기 전반 고위공직자 절반 이상이 이들 초계문신 출신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는 노론 세력의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이에 한 발 물러난 정조는 1790년대부터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화정책을 펼쳤다. 문체를 단속하여 '순수하고 바르게' 함으로써 문풍(文風)을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조가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은, 그 무렵 청에서 흘러 들어와 유행하던 패관소품(稗官小品)이었다. 요즘의 단편소설과 수필의 중간쯤 되는 글을 말한다. 그것을 '잡글'로 치부하며 억압하는 한편으로 정조는 규장각에 있던 소설들을 태워버리고, 패관소품과 잡서(雜書)의 수입도 금하였다.

한편,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문체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정조는 이들에게 때 묻지 않은 문체로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고 강요하였다. 문제의 선비들은 '반성문'을 쓰고 나서 '혐의'를 벗었다. 하지만 감수성 넘치던 이옥(李鈺) 같은 작가는 끝내 제 문체를 고집하다가 조정에서 완전히 퇴출되기도 하였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불러온 사건이었다. 또한 관권으로 학문과 예술을 통제하는 것은, 모처럼 싹트던 문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정조는 왜 그렇게 소설을 싫어하였을까? 그것은 소설이 지닌 리얼리즘적 속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당시 소설은 허울뿐인 양반 지배에 대한 불만과 조롱을 담고 있었다.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이나 '호질'이 대표적인 예다. '임금이자 스승'인 정조는, 그런 소설들로 인하여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극도로 싫었을 터다. 더불어 그러한 소설이 현실에 대하여 불러일으킬 냉소적 비판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한편으로 소설은 역사와 공동체 속에 매몰된 개개인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투박하고 구체적인 언어가 쓰이게 마련이다. 언어적 다양성이 구현되는 것이다. 고상하고 정제된 시문학에 익숙한 사람들 눈에는 까칠하기 그지없는 언어들이다. 체제안정과 왕권강화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정조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소설은 현실 체제를 비웃으며 변혁을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미래지향적이며, 진보적이다. 반면에 시는 과거를 지향하고, 체제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도구였다. 정조는 애초에 문학의 정서적 기능은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소설은 '치세의 글'이 아닐뿐더러 심신의 활동력을 분산시킨다고 보았다. 정조가 소설을 싫어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정조는 학문과 문화를 철저히 정치에 종속시켰다. 주자학의 본고장 중국은 이미 오랑캐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지만, 정조는 중국의 과거를 열심히 파헤치며 자신이 주자학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부했다, 정조는 강력한 왕이면서 으뜸가는 스승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군사(君師)'라고 칭했다. 그는 27명의 조선 군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무려 180권 100책에 달하는 그의 문집은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됐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자타가 인정하는 부지런한 군주였다. 더불어 자기개혁에 철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개혁이나 체제개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서까지 전통체제 강화에 힘을 쏟은 보수주의자였다. 더불어, 너무 부지런해서 늘 피곤할 수밖에 없는 교조주의자이기도 했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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