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프랑스 혁명기의 문제아 '나폴레옹'

설경. 2008. 3. 20. 13:47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프랑스 혁명기의 문제아 '나폴레옹'

프랑스 영웅의 성공신화는 거품

지치지 않는 정복욕으로 200년 전 유럽 대륙에 불을 지른 사나이 나폴레옹. 1769년 프랑스 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부터 프랑스에 유학하여 병사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지독한 사투리 때문에 본토 귀족자제들로부터 '코르시카의 촌놈'이라고 놀림을 당하며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졸업 성적은 58명 중 42등. 하지만 프랑스 왕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출세의지만큼은 단연 1등이었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사관학교를 마치고 포병장교로 근무하던 1789년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스무 살의 청년 장교는 시민과 국왕을 싸잡아 비아냥거릴 정도로 혁명에 냉소적이었다. 그러던 나폴레옹이 1793년에는 당시 집권자인 로베스피에르와 결탁하여 왕당파의 반란을 격파하고 이탈리아 원정군 포병 사령관이 된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였을 때 잠시 장교 직을 박탈당한 그는 이듬해 왕당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다시 진압대장으로 발탁돼 실력을 발휘하고, 총재정부의 군사령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원정에서 많은 재물과 예술품을 강탈하여 프랑스 품 안에 안겨주었다.

다음 정복지는 동서양의 관문인 이집트 . 영국 인도 진출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5만 원정군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넌 나폴레옹은 작열하는 사막에서 이집트 기병대를 연달아 격파하고 카이로 를 거쳐 시리아 , 수에즈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후방의 보급을 차단하는 바람에 1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 무렵 프랑스 에서는 왕당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귀국길에 오른다.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1799년 11월 9일. 원로원과 500인 회의는 총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총재정부는 해체됐고,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뒤코스 등과 함께 통령 정부를 구성했다. 그렇게 프랑스의 통치자가 된 나폴레옹은 본격적인 '유럽 사냥'에 나서는 한편,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농민의 토지 소유를 입법화했다. 또 교육 시설을 확충하고 실업률을 낮췄다. 그는 종신통령이 됐고, 나아가 왕이 되는 꿈을 꿨다. 하지만 '혁명의 아들'이 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되기로 하였다.

1804년 5월, 마침내 나폴레옹은 원로원과 결탁, 황제세습제를 발표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부친다. 국민은 나폴레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2일, 노트르담 사원에서는 성대한 황제 대관식이 열렸다. 작곡가 베토벤은 황제에게 교향곡 '영웅'을 헌정했다. 그렇게 황제가 된 그는 "정복이 나를 만들고, 정복을 통해서만 내 삶이 유지된다"며 계속 군대를 육성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하고, 유럽동맹군의 반격을 받았지만, 정복자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을 교활한 유인전술로 격파하며 위기를 벗어난다. 그리고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더불어 1808년, 스페인 점령 시에는 그곳 시민과 병사 5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한편, 1812년에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에 응하지 않은 러시아를 향하여 직접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그러나 제대로 싸움도 못 해본 채 50만 병력이 혹한에 희생됐다. 독한 감기로 콧물을 질질 흘리며 정복자는 남은 병사를 이끌고 간신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1814년 3월에 파리로 들이닥친 연합군이 그를 엘바 섬으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왕정이 복고되어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재기를 노렸지만, 워털루전투에서 다시 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된다. 영웅의 성공신화는 거기서 끝났다.

뒷날 사가(史家)들은 끊임없이 정복자 나폴레옹에게 영웅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나폴레옹은 네 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다거나, 작은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삼각 모자를 만드는 디자인 감각마저 가졌다는 것 따위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하루 8시간 수면에 낮잠까지 잤다고 한다. 한편, 러시아 원정 때 나폴레옹이 콧물감기를 앓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멸망했을 것이라는 억측도 있다.

'콧물감기'가 러시아 의 구세주라니, 이는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권력투쟁에 휘말려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단두대에 올랐을 지도 모를 나폴레옹.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출세 길을 모색했다. 그는 부르봉 왕조의 봉건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프랑스 민중의 요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황제가 됐다. 그리고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결국 그는 '정복의 자유'와 '평등한 박해'를 실천한, 프랑스 혁명기의 '문제아'였던 것이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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