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금화당서 10월12일부터 닷새간 만신대탁굿
김 만신이 10년만에 다시 하는 무속예술의 진수
굿은 종교적으로는 巫敎, 예술적으론 종합예술
(강화=연합뉴스) 강일중 편집위원 = "외국 사람들 정말 춤 잘 추데…. 어깨춤을 추면서 고개를 꺼덕꺼덕해요. 유럽 가면요, 춤을 추다 씨(쓰)러져요. 씨러져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 뭐 기절하다시피 하는 사람, 별 사람들 다 있어요."
김금화(金錦花.77) 만신(여자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은 그간 잦았던 해외 굿 공연이 화제가 되자 얼굴이 더욱 활기를 띤다. 갑자기 황해도 사투리도 더욱 많이 섞여나오는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표가 없어서 울며 되돌아간 사람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 때는 '내가 무당이 잘 됐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해요."
해외 공연이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굿을 미신으로 치부한다. "굿을 보고 속으로 좋아하면서도 매스컴에 굿을 보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걱정해요. 그렇지만 외국 관객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화끈하게 굿을 받아들여요."
중요무형문화재인 서해안 풍어제 배연신굿과 대동굿 예능보유자인 김금화 만신은 이제는 나라 안팎에서 아주 당연하게 한국 최고의 무당으로 또한 공연예술가로 대접을 받는다.
그는 심한 무병(巫病)을 앓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강신무가 됐다.
그 이후 오랜기간 많은 사람들의 천대 속에 그가 겪었던 죽음과도 같았던 아픔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팔순으로 향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도 크고 작은 국내외 굿 행사로 쉴틈없이 바쁘다.
얼마 전 강화도의 금화당에서 만난 그는 그전 며칠 간도 전라도 해남의 대한조선 도크 준공식에 굿을 해 주러 갔다왔다고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금화당은 굿 체험과 굿 교육의 공간으로서 2년 전 강화읍 부근 하점면의 나지막한 산 기슭에 세운 굿당이다. 오는 9월 8일과 9일에는 인천연안부두 친수공원에서 서해안풍어제(대동굿과 배연신굿)를 올린다.
더 큰 행사는 10월에 있다. 12일부터 닷새 간 금화당에서 벌이는 만신대탁굿이다. 이 굿은 그의 고향 황해도지역에서 전승되는 무속의례 중 규모가 가장 큰 것. 산 사람과 죽은 영혼을 위한 의식을 같은 순서로 반복해 행하는 이 굿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특히 소, 돼지를 포함한 막대한 재물과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어서 굿에 평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신대탁굿을 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제가 무당이 된 지 올해 60년이 됐어요. 그래서 그 걸 기념하기 위해서 하려는 거예요. 경기도 파주의 기장사라는 곳에서 1997년에 했는데 그 때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다시 하는 거지요."
무속 예술의 진수이며 오직 큰 무당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만수대탁굿을 그동안 그가 벌인 것은 다섯 번. 큰 무당이라고 해도 평생 세 번 하면 잘한다고 하는 만수대탁굿을 그는 이번에 여섯 번째로 하는 것이다.
"1970년에 서울 석관동에 살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수대탁굿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굿을 못하게 진정을 했어요. 그래서 중도에 그만뒀죠. 1981년에 신문로에서 다시 하려 했는데 처음에 허락했던 사람들이 막상 굿을 시작하니까 등을 돌리더군요. 그 이후에 80년대 중반에 우이동의 전씨네굿방에서 두 번 하고 마지막으로 10년 전에 파주에서 했던 거죠."
대택굿, 만구대탁굿, 만구대택굿이라고도 하는 이 굿은 신들에게 굿의 시작을 알리는 '신청울림'으로 시작해 '마당굿'으로 마무리짓는 등 모두 37거리로 돼 있다. 이 거리들이 닷새 간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기본적으로 노인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굿이지만 굿이 중간에 가면 놀이로 바뀝니다. 막둥이가 몇 십년 만에 어마이를 만나는 굿이나 즉흥성의 해학적인 거리가 있어요. 사또놀이같은 거지요. 구관사또가 뇌물 먹고 기생들하고만 노는 얘기. 신관사또가 부임해서 동구 밖에서 구관사또의 품행이 어떤가 물어보는 거. 암행어사 얘기 같은 게 나오지요."
전통제의와 공연이 어우러진 형태의 굿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당이면서 관객 입장에서는 배우이기도 하다.
김금화 만신이 지난달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주도한 '사도세자 진혼제'는 배우가 된 무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혼제에서 그는 뒤주에 갇혀 물을 달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재연해 낸다.
"그 때는 김금화가 아니에요. 자제를 할 수가 없구요. 그 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사도세자가 되는 겁니다. 어떤 때는 돌아가신 분이 선명하게 굿할 때 나타나요. 몸과 마음으로 그 분이 오는 거라구요. 김금화의 몸과 마음이 아닌 거지요. 우리가 영을 청하지 않습니까? 그 걸 청배(請陪)라고 해요. 청배를 하면 그런 기운이 와요."
그는 굿이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종합예술이라고도 얘기한다. 그러나 역시 근본적으로 굿은 무교(巫敎)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굿은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한이 맺혔던 것도 풀어주고 화도 풀고 굿을 통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마음을 신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
김 만신은 아픈 손자를 낫게 해 달라며 소복을 입고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무당을 비교하며 굿이 우리의 삶,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보살피고 거둬주라고 비는데 방식이 다르다 뿐이지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와 다를 바 없는데 굿을 배척하고 무당을 왜 무서워하는지 알 수 없다고 김 만신은 얘기한다.
굿은 미신이라는 등식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만큼 굿 행사에 대한 공적 지원은 아직 미흡하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9월 8-9일 예정된 서해안풍어제 행사 역시 빠듯한 예산으로 하려니 아쉬운 점이 많다. 만신대탁굿은 더더구나 규모가 엄청나게 큰 굿잔치이니 만큼 들어갈 돈도 많지만 역시 사정이 여의치 않은 편이다. 독지가가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지만 쉽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며 김 만신은 안타까워한다.
김포에서 차로 48번 국도를 따라 강화읍을 지나 10여분을 간 후 17번 지방도로로 우회전 하면 얼마 안 있어 왼편 산 쪽으로 도올 김용옥이 글씨를 쓴 금화당 간판이 보인다. 금화당 본채 안에는 2006년 2월 태국에서 작품활동 중 작고한 굿 전문 사진작가 김수남 씨의 굿 사진들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다. 이곳에서 10월 12일부터 무속예술의 진수라고 하는 만신대탁굿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김금화 만신은 =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2살 때부터 심한 무병을 앓다 17세 때 외할머니의 내림굿을 받고 강신무(降神巫)가 됐다.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배연신굿 및 대동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서해안풍어제의 맥을 잇고 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사업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사회에 한국의 굿을 소개한 이래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여러나라와 호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한국의 탁월한 무속예술을 선보여왔다. 파리의 가을축제, 뉴욕의 링컨센터페스티벌, 일본의 국제민속예능축제 등에 참가하면서 관객들의 깊은 관심을 모았다. 내년에도 오스트리아의 샤머니즘대회에 참가해 굿 공연을 할 예정이다. 김 만신은 그간 자신과 무속의례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올해 강신 60주년을 맞아 만수대탁굿을 하는 것을 계기로 자서전을 출판할 예정이며 그에 앞서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라는 단행본과 '김금화 무가집'을 냈다. 중견작가 이경자 씨가 쓴 '계화'라는 소설은 김 만신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2005년 강화도에 금화당을 지어 굿의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서 활용하고 있으며 서울 이문동에 서해안풍어제연구소를 열어놓았다.인터넷사이트는 www.mudang.org
김 만신이 10년만에 다시 하는 무속예술의 진수
굿은 종교적으로는 巫敎, 예술적으론 종합예술
(강화=연합뉴스) 강일중 편집위원 = "외국 사람들 정말 춤 잘 추데…. 어깨춤을 추면서 고개를 꺼덕꺼덕해요. 유럽 가면요, 춤을 추다 씨(쓰)러져요. 씨러져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 뭐 기절하다시피 하는 사람, 별 사람들 다 있어요."
김금화(金錦花.77) 만신(여자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은 그간 잦았던 해외 굿 공연이 화제가 되자 얼굴이 더욱 활기를 띤다. 갑자기 황해도 사투리도 더욱 많이 섞여나오는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표가 없어서 울며 되돌아간 사람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 때는 '내가 무당이 잘 됐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해요."
해외 공연이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굿을 미신으로 치부한다. "굿을 보고 속으로 좋아하면서도 매스컴에 굿을 보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걱정해요. 그렇지만 외국 관객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화끈하게 굿을 받아들여요."
중요무형문화재인 서해안 풍어제 배연신굿과 대동굿 예능보유자인 김금화 만신은 이제는 나라 안팎에서 아주 당연하게 한국 최고의 무당으로 또한 공연예술가로 대접을 받는다.
|
얼마 전 강화도의 금화당에서 만난 그는 그전 며칠 간도 전라도 해남의 대한조선 도크 준공식에 굿을 해 주러 갔다왔다고 했다. 그의 이름을 딴 금화당은 굿 체험과 굿 교육의 공간으로서 2년 전 강화읍 부근 하점면의 나지막한 산 기슭에 세운 굿당이다. 오는 9월 8일과 9일에는 인천연안부두 친수공원에서 서해안풍어제(대동굿과 배연신굿)를 올린다.
더 큰 행사는 10월에 있다. 12일부터 닷새 간 금화당에서 벌이는 만신대탁굿이다. 이 굿은 그의 고향 황해도지역에서 전승되는 무속의례 중 규모가 가장 큰 것. 산 사람과 죽은 영혼을 위한 의식을 같은 순서로 반복해 행하는 이 굿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특히 소, 돼지를 포함한 막대한 재물과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어서 굿에 평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신대탁굿을 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제가 무당이 된 지 올해 60년이 됐어요. 그래서 그 걸 기념하기 위해서 하려는 거예요. 경기도 파주의 기장사라는 곳에서 1997년에 했는데 그 때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다시 하는 거지요."
무속 예술의 진수이며 오직 큰 무당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만수대탁굿을 그동안 그가 벌인 것은 다섯 번. 큰 무당이라고 해도 평생 세 번 하면 잘한다고 하는 만수대탁굿을 그는 이번에 여섯 번째로 하는 것이다.
"1970년에 서울 석관동에 살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수대탁굿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굿을 못하게 진정을 했어요. 그래서 중도에 그만뒀죠. 1981년에 신문로에서 다시 하려 했는데 처음에 허락했던 사람들이 막상 굿을 시작하니까 등을 돌리더군요. 그 이후에 80년대 중반에 우이동의 전씨네굿방에서 두 번 하고 마지막으로 10년 전에 파주에서 했던 거죠."
대택굿, 만구대탁굿, 만구대택굿이라고도 하는 이 굿은 신들에게 굿의 시작을 알리는 '신청울림'으로 시작해 '마당굿'으로 마무리짓는 등 모두 37거리로 돼 있다. 이 거리들이 닷새 간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기본적으로 노인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굿이지만 굿이 중간에 가면 놀이로 바뀝니다. 막둥이가 몇 십년 만에 어마이를 만나는 굿이나 즉흥성의 해학적인 거리가 있어요. 사또놀이같은 거지요. 구관사또가 뇌물 먹고 기생들하고만 노는 얘기. 신관사또가 부임해서 동구 밖에서 구관사또의 품행이 어떤가 물어보는 거. 암행어사 얘기 같은 게 나오지요."
전통제의와 공연이 어우러진 형태의 굿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당이면서 관객 입장에서는 배우이기도 하다.
김금화 만신이 지난달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주도한 '사도세자 진혼제'는 배우가 된 무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혼제에서 그는 뒤주에 갇혀 물을 달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재연해 낸다.
"그 때는 김금화가 아니에요. 자제를 할 수가 없구요. 그 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사도세자가 되는 겁니다. 어떤 때는 돌아가신 분이 선명하게 굿할 때 나타나요. 몸과 마음으로 그 분이 오는 거라구요. 김금화의 몸과 마음이 아닌 거지요. 우리가 영을 청하지 않습니까? 그 걸 청배(請陪)라고 해요. 청배를 하면 그런 기운이 와요."
그는 굿이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종합예술이라고도 얘기한다. 그러나 역시 근본적으로 굿은 무교(巫敎)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굿은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한이 맺혔던 것도 풀어주고 화도 풀고 굿을 통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마음을 신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
김 만신은 아픈 손자를 낫게 해 달라며 소복을 입고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무당을 비교하며 굿이 우리의 삶,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보살피고 거둬주라고 비는데 방식이 다르다 뿐이지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와 다를 바 없는데 굿을 배척하고 무당을 왜 무서워하는지 알 수 없다고 김 만신은 얘기한다.
굿은 미신이라는 등식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만큼 굿 행사에 대한 공적 지원은 아직 미흡하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9월 8-9일 예정된 서해안풍어제 행사 역시 빠듯한 예산으로 하려니 아쉬운 점이 많다. 만신대탁굿은 더더구나 규모가 엄청나게 큰 굿잔치이니 만큼 들어갈 돈도 많지만 역시 사정이 여의치 않은 편이다. 독지가가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지만 쉽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며 김 만신은 안타까워한다.
김포에서 차로 48번 국도를 따라 강화읍을 지나 10여분을 간 후 17번 지방도로로 우회전 하면 얼마 안 있어 왼편 산 쪽으로 도올 김용옥이 글씨를 쓴 금화당 간판이 보인다. 금화당 본채 안에는 2006년 2월 태국에서 작품활동 중 작고한 굿 전문 사진작가 김수남 씨의 굿 사진들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다. 이곳에서 10월 12일부터 무속예술의 진수라고 하는 만신대탁굿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김금화 만신은 =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2살 때부터 심한 무병을 앓다 17세 때 외할머니의 내림굿을 받고 강신무(降神巫)가 됐다.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배연신굿 및 대동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서해안풍어제의 맥을 잇고 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사업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사회에 한국의 굿을 소개한 이래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여러나라와 호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한국의 탁월한 무속예술을 선보여왔다. 파리의 가을축제, 뉴욕의 링컨센터페스티벌, 일본의 국제민속예능축제 등에 참가하면서 관객들의 깊은 관심을 모았다. 내년에도 오스트리아의 샤머니즘대회에 참가해 굿 공연을 할 예정이다. 김 만신은 그간 자신과 무속의례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올해 강신 60주년을 맞아 만수대탁굿을 하는 것을 계기로 자서전을 출판할 예정이며 그에 앞서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라는 단행본과 '김금화 무가집'을 냈다. 중견작가 이경자 씨가 쓴 '계화'라는 소설은 김 만신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2005년 강화도에 금화당을 지어 굿의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서 활용하고 있으며 서울 이문동에 서해안풍어제연구소를 열어놓았다.인터넷사이트는 www.mudang.org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한나 칼럼] 내가 평생 사랑할 남자―베토벤 (0) | 2007.09.02 |
---|---|
메르켈, 2년 연속 '파워우먼' 1위 (0) | 2007.09.01 |
장편소설 ‘추사’ 쓴 한승원씨 (0) | 2007.08.30 |
이해인 수녀 “테레사 편지도 신을 부정 안 해” (0) | 2007.08.30 |
"[스포트라이트]고뇌 속에 꽃피운 헌신" (0) | 2007.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