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옛글의 숨결]보르헤스, ‘전체와 무(無)’

설경. 2008. 4. 23. 14:42
그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얼굴 뒤로, 그리고 그의 모방적이고 환상적이고 격정적인 말들 뒤에는 약간의 냉소와 아무도 꾸지 않는 꿈 이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처음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공허함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던 동료의 이상한 태도가 그의 잘못을 깨닫게 했다. 어느날 갑자기 그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유별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죽기 직전 또는 직후에 신에게 가서 물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 되어본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회오리 바람 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내가 아닌걸. 네가 나를 꿈꾸었던 것처럼, 나도 세상을 꿈꾸었다. 내 꿈의 여러 형상들 속에 나처럼 모두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네가 있다."

(보르헤스, '전체와 무(無)')
사람은 누구나, '어떤' 누구이면서 아무도 아니다. '모두'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각각 어떤 누군가로 산다. 하지만 어떤 나로 산다고 해서 다른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의 모든 '나'를 한 데 모아 전체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라는 존재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정적으로 '나'는 지금 현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누구이면서, 모두이면서, 아무도 아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무언가를 꿈꾸고 희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희망은, 미래에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바라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그 때까지 지금 이 순간을 살도록 채찍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절대 저 멀리 외따로 존재하는 불빛 같은 것도, 혹시 기대로 삶을 부풀리는 복권 같은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이 되면 훨씬 나은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건이란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고 삶에 대한 욕망은 지금의 내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 미래는 내가 한 발을 내딛는 지금 이 순간부터를 의미한다.

〈 문성환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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