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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등 삼성과 관련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 회장이 그룹 회장에 취임한 1987년 이후 20년 동안 삼성은 매출 8.9배, 순이익 53배, 시가총액 140배, 수출 74배가 늘어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컸다. 부인 홍라희씨도 리움미술관 관장과 문화재단 이사직을 사임하고, 아들 재용씨는 삼성전자 고객총괄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나 해외 현장 경험을 쌓기로 했다. 삼성 사태에 대해 총수 일가족이 먼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삼성그룹은 이 같은 총수 일가(一家) 동반 퇴장을 포함해 10가지 항목의 경영 쇄신안을 내놓았다. 이 회장의 손발이자 삼성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전략기획실도 해체하고, 임원 2~3명 규모의 소규모 업무지원실을 사장단협의회 산하에 두기로 했다. 삼성의 '실세(實勢)'로 불리던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도 이번 쇄신안에 따른 잔무(殘務)처리를 끝내는 대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삼성은 전략기획실 해체와 이 회장 등의 사임은 6월 말까지 법적 절차를 모두 끝내고 7월 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했다.
특검 수사에서 조세포탈 혐의가 드러난 차명(借名)계좌는 실제 소유자인 이 회장 명의로 실명전환하고 세금을 납부한 뒤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이 회장의 차명재산 규모는 4조5000억원으로 평가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산(金産)분리 완화 정책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은행' 문제에 대해선 "삼성은 은행업에 진출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삼성과 직무상 연관이 있는 인사들은 사외이사로 선임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삼성이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지주(持株)회사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당장 추진하기는 어렵고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고 했다. 지주회사 전환에 20조원의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데다 그룹 경영권이 위협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을 4~5년 내 매각해 순환출자의 핵심 고리 가운데 하나를 풀겠다고 했다.
이번 삼성의 경영 쇄신안은 현실적으로 삼성이 내놓을 수 있는 한계 안의 최대치(最大値)라는 느낌이 든다. 이 회장 본인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 매각 등등이다. 삼성은 '삼성의 쇄신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도 고칠 것이 있으면 적극 고쳐 나가겠다'고 했다. 특검이 삼성에 면죄부(免罪符)만 주고 끝냈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사회 분위기가 쇄신안의 강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회장과 전략기획실이 사라진 삼성에서 계열사 독립 경영체제가 순조롭게 자리잡을 수 있을지, 앞으로 경영권 승계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기도 했다. 다른 어느 그룹보다 일사불란한 조직문화와 의사결정 체제를 자랑하는 삼성이 개별 기업체제로 바뀐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전략기획실을 대신하는 사장단협의회가 계열사 간 중복 투자 정리와 그룹 차원의 전략사업 육성 같은 일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삼성이 이런 문제를 법(法)을 우회(迂廻)해서 넘어가는 또 다른 편법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삼성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기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흔쾌히 우리의 자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늘의 삼성 모습이 기업의 경계를 넘어 권력화하는 느낌과 우려를 갖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문·문화·예술·언론 등 모든 분야가 독립해서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가 건전하게 공존(共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삼성 및 삼성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들은 이런 사회 각 분야의 독립성을 무너뜨리고 법(法) 위의, 때론 법(法) 밖의 수단을 동원해 사회 각계를 포섭하고 지배하려 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생태계(生態系)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회의 경계심을 불러온 탓에 오늘의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어제 회견이 삼성이 이런 과거와 확실하게 결별하고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내고 국민의 사랑을 받고 국민이 자랑으로 생각하는 국민적 글로벌 기업으로 다시 한번 도약하는 재출발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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