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충족돼야 하는 육체적 욕구, 禮로 다스려야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을 하려면 꽤 많은 시간 고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쉽다.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육체적 욕구'이다. 물론 혹자는 너무나도 숭고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식투쟁이라는 미명하에 이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들조차 육체적 욕구의 충족이 사람들에게 가장 기초적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육체적 욕구를 단순히 기초적인 것 정도로 평가하는 생각에는 인간을 짐승보다 우월한 존재로 간주하는 자존감이 전제돼 있다. 본능에 따른 행위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감히 인간으로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아무런 착오가 없다면 본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덕목들이 대립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여기는 덕목들과 육체적 욕구는 대립하는 것일까? 오히려 숭고하게 여기는 덕목들조차 육체적 욕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편에서 필자는 맹자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이 배부른 아이가 젖병을 물지 않으려는 모습으로부터 연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사양하는 마음이 육체적 욕구의 충분한 충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차리라는 맹자의 말이 반드시 육체적 욕구를 멀리해야 한다는 충고는 아닌 셈이다.
순자가 말하는 악한 본성의 뿌리 역시 육욕(肉慾)이다. 하지만 피곤하면 눕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은 마음, 이것을 어찌 '악(惡)'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순자의 이야기가 맹자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육체적 욕구를 통제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그래서 순자가 말하는 예(禮)는 맹자의 그것과 다른 뜻이 된다. 맹자는 예가 처음부터 인간의 본성에 내재돼 있다고 파악했지만, 순자는 스스로 조절하기 어려운 육체적 욕구를 사회적 규범을 통해 다스리도록 제시한 장치가 바로 예다. 이와 같은 차이가 있음에도 육체적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통제'라는 단어 때문에 이 둘을 또 다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한'이라는 수식어를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은 곧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킨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필요이상의 지나친 욕구의 표출이지 자연스런, 혹은 기초적인 욕구가 아니다. 한껏 맛나게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의 입에서 그 맛난 것을 빼버리는 것은 또한 아이에 대한 예가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육체적 욕구의 충족이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임을 함축한다. 아무리 삶이 어렵더라도 먹는 문제는 기필코 해결돼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성경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역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육체적 욕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욕구는 더 이상 단순한 기초적인 것 정도로 평가돼서는 안 된다. 분명 육체적 욕구는 짐승의 본능과 정확히 같은 뜻이지만 그래도 그것의 충족은 중요하다. 이러한 욕구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확실하게 충족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충족은 매우 적절해야 한다. 모자라도 지나쳐서도 안 된다. 짐승들은 과식을 하지 않는단다. 사람들의 숙원인 육체적 욕구의 절제에 있어서 만큼은 도가 튼 존재가 동물들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억지로 굶기도 하고, 인간들만이 배꼽이 튀어나오도록 먹고서는 만족스러워 하기도 한다. 따라서 '짐승만도 못한 놈'은 진짜 못난 사람이지만, '짐승 같은 놈'이라는 표현은 바르지 않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짐승 같은 분'이라 부르는 것이 더 온당하다.
교육과학기술부
가 그 동안 제시하고 있던 많은 규제조치를 없앤다고 발표했다. 눈에 띄는 항목이 있으니 바로 '0교시 금지 조항' 폐지이다. 이 조항은 0교시로 인해 아침을 굶고 다니는 학생들에게 아침을 먹도록 해주자는 뜻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충족돼야 할 육체적 욕구도 중요함을 국민적 합의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조항인 것이다. 개별 학교나 교육단체들에게 보장해 줬다는 자율권이 '무한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행여라도 엉뚱한 횡포로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짐승조차도 보장 받는 먹을 권리를 학생들로부터 빼앗는 우(愚)를 또다시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마땅한 육체적 욕구의 정당한 충족을 위해서는 예(禮)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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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을 하려면 꽤 많은 시간 고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쉽다.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육체적 욕구'이다. 물론 혹자는 너무나도 숭고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식투쟁이라는 미명하에 이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들조차 육체적 욕구의 충족이 사람들에게 가장 기초적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육체적 욕구를 단순히 기초적인 것 정도로 평가하는 생각에는 인간을 짐승보다 우월한 존재로 간주하는 자존감이 전제돼 있다. 본능에 따른 행위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감히 인간으로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아무런 착오가 없다면 본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덕목들이 대립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여기는 덕목들과 육체적 욕구는 대립하는 것일까? 오히려 숭고하게 여기는 덕목들조차 육체적 욕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편에서 필자는 맹자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이 배부른 아이가 젖병을 물지 않으려는 모습으로부터 연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사양하는 마음이 육체적 욕구의 충분한 충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차리라는 맹자의 말이 반드시 육체적 욕구를 멀리해야 한다는 충고는 아닌 셈이다.
순자가 말하는 악한 본성의 뿌리 역시 육욕(肉慾)이다. 하지만 피곤하면 눕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은 마음, 이것을 어찌 '악(惡)'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순자의 이야기가 맹자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육체적 욕구를 통제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그래서 순자가 말하는 예(禮)는 맹자의 그것과 다른 뜻이 된다. 맹자는 예가 처음부터 인간의 본성에 내재돼 있다고 파악했지만, 순자는 스스로 조절하기 어려운 육체적 욕구를 사회적 규범을 통해 다스리도록 제시한 장치가 바로 예다. 이와 같은 차이가 있음에도 육체적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통제'라는 단어 때문에 이 둘을 또 다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한'이라는 수식어를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은 곧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킨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필요이상의 지나친 욕구의 표출이지 자연스런, 혹은 기초적인 욕구가 아니다. 한껏 맛나게 엄마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의 입에서 그 맛난 것을 빼버리는 것은 또한 아이에 대한 예가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육체적 욕구의 충족이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임을 함축한다. 아무리 삶이 어렵더라도 먹는 문제는 기필코 해결돼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성경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역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육체적 욕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욕구는 더 이상 단순한 기초적인 것 정도로 평가돼서는 안 된다. 분명 육체적 욕구는 짐승의 본능과 정확히 같은 뜻이지만 그래도 그것의 충족은 중요하다. 이러한 욕구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확실하게 충족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충족은 매우 적절해야 한다. 모자라도 지나쳐서도 안 된다. 짐승들은 과식을 하지 않는단다. 사람들의 숙원인 육체적 욕구의 절제에 있어서 만큼은 도가 튼 존재가 동물들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억지로 굶기도 하고, 인간들만이 배꼽이 튀어나오도록 먹고서는 만족스러워 하기도 한다. 따라서 '짐승만도 못한 놈'은 진짜 못난 사람이지만, '짐승 같은 놈'이라는 표현은 바르지 않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짐승 같은 분'이라 부르는 것이 더 온당하다.
교육과학기술부
가 그 동안 제시하고 있던 많은 규제조치를 없앤다고 발표했다. 눈에 띄는 항목이 있으니 바로 '0교시 금지 조항' 폐지이다. 이 조항은 0교시로 인해 아침을 굶고 다니는 학생들에게 아침을 먹도록 해주자는 뜻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충족돼야 할 육체적 욕구도 중요함을 국민적 합의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조항인 것이다. 개별 학교나 교육단체들에게 보장해 줬다는 자율권이 '무한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행여라도 엉뚱한 횡포로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짐승조차도 보장 받는 먹을 권리를 학생들로부터 빼앗는 우(愚)를 또다시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마땅한 육체적 욕구의 정당한 충족을 위해서는 예(禮)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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