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토플러가 말한 ‘비살상 전쟁’을 논하라

설경. 2008. 4. 29. 14:25
[한겨레] 우리말 논술 / 46.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의 의미는?
관련 논제 해결하기 [난이도 = 고2~고3]

< 논제 > 제시문 (가), (나)에서는 미래의 전쟁 양상에 대해 각기 다르게 예측하고 있다. 각 입장 및 근거를 간단히 설명하고, 이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택해 그 견해를 지지하고, 예상되는 반론에 대해 반박하시오. (800±100자)

(가)

1993년 5월에 미국 법무장관 재닛 리노(Janet Reno)는 상원에 나와서 텍사스주 와코에서 있었던 종말론적 사이비종교 신도들과의 대치상황에서 연방수사국(FBI)이 수행한 역할을 설명했다. 다윗파 신도들의 숙소를 휩쓴 불길은 72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사방에서 역습을 불러일으켰다. 리노는 상원의원들에게 자기는 연방수사국(FBI)의 공격이 있기 전의 협의기간 중에 여러 생명, 특히 광신도들이 억류한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어떤 살상력 없는 '마술 같은' 무기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고 말했다.

재닛 모리스와 그 남편 크리스의 덕분으로 언젠가는 그러한 무기가 나타날 것이다. (중략) 모리스 부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쟁은 항상 끔찍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적이라는 평판을 받을 만한 강대국이라면 비살상방위 원칙에서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 지금은 기술발달 덕분에 침략을 저지하면서도 적군까지도 살려 주는 선택이 가능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우리는 이 능력을 개발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살상무기가 갖는 중대한 함의에 비추어 볼 때 군부의 의견이 나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 미 육군참모총장이며 현재 GSC자문위원인 마이어는 "육군 안에는 이를 강력히 지지하는 그룹과 강력히 반대하는 그룹이 있다"고 말한다. 일부에서는 전쟁은 본질적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이며 비살상이란 것은 전혀 '남자답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구시대 전쟁형의 유물이며 현재 등장하고 있는 제3물결 전쟁형의 윤리 및 기술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적 정신은 걸프전쟁 기간 중 미국 시엔엔(CNN) 방송사의 군사문제 해설자 스미스가 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미공군의 장기계획 부책임자를 지낸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군사계획 입안자는 폭탄과 미사일을 사용하여 목표물을 정확히 공격하는 것 이상을 내다보아야 한다. 곧 군인들을 죽이거나 목표물을 완전 파괴하지 않고서도 군사목표의 핵심요소들을 파괴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오게 될 것이다. 엔진 작동을 방해하거나 포사격 컴퓨터를 망가뜨려 적의 탱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비살상적 수단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의 견해에 존 워든 대령도 동조한다. 미국의 대이라크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친 와든은 걸프전쟁이 "낡은 살육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인명과 환경 그리고 심지어 국가예산 면에서도 훨씬 적은 희생으로 동일한 일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과도기로 넘어가는" 대전환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걸프전쟁이 끝난 지 1년 후에 미 국방부는 체계적 비살상전쟁-때로 '소프트 킬(soft-kill)'이라고도 한다-의 기술과 독트린을 개발한다는 구상을 공식으로 승인했다. 최근 미국의 군사비 삭감 파동은 이 구상을 잠정적으로 마비시켰지만, 그래도 예산 감축 노력 자체는 더 값싸고 더 선택적인-따라서 더 비살상적인-전투형태를 모색하는 노력을 더욱 촉진하게 될 것이다.

-앨빈 토플러, < 전쟁과 반전쟁 > , 189~190쪽
(나)

3월21일 밤(현지시각)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대규모 공습인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작전을 개시하면서 바그다드 곳곳은 폭발음과 불기둥, 연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폭발이 물결치고 불덩어리에 뒤덮인 바그다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화면 등을 받은 뉴스 화면에는 모래바람을 뚫고 사막을 달리는 미군 탱크 모습들만 나올 뿐이다.

500만 명이 사는 바그다드에 대한 융단폭격이나 오폭으로 인한 참혹한 피해는 어쩌면 영원히 묻힐 것이다. 1991년 걸프전 때도 이라크 민간인이 15만~20만 명 가량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민간인 피해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미군 당국은 민간인 피해를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란 모호한 용어로 발표하는 등 민간인 피해가 쟁점이 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라크전 개전 전부터 반전여론 등을 의식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첨단무기를 총동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 뉴스위크 > 3월17일치는 미국이 준비한 최신무기의 특징은 '최소파괴무기'라고 보도했다. 최소파괴무기는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기 위해 무조건 파괴력을 높이던 예전의 대량살상무기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이 무기는 후세인 대통령과 이라크 국민을 분리해 대응하겠다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과도 맥을 같이한다. 최첨단 정밀타격 수단으로 죄 없는 이라크 민중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후세인 등 이라크 지도부만 '콕 찍어'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언론들은 목표물만 찍어 타격하는 미군의 '인도적' 첨단무기를 앞다투어 소개했다.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하는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조종사가 다칠 걱정이 없는 무인항공기(UAV),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기능을 갖춘 폭격기인 B1, B-2, 전투기 F-117A, JDAM 같은 정밀유도폭탄, 날아오는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할 패트리엇 미사일 등이 집중 조명됐다. 미국은 이라크전에서 컴퓨터와 위성위치추적시스템을 단 '스마트'(똑똑한) 폭탄 사용률을 80~90%까지 끌어올려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91년 걸프전과 99년 코소보전,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을 거치며 '베트남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미국은 베트남의 산악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과 허우적거리며 싸우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걸프전은 정찰위성 등을 이용한 감시·정찰 능력과 토마호크 등 장거리 정밀타격 미사일로 이라크의 전략적 중심을 마비시켰고,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인항공기를 이용해 상대 방공무기 사정거리 밖에서 표적을 식별한 뒤 정밀폭격을 해 상대의 군사작전력을 무능화시켰다. 미국은 미래의 전쟁 양상은 최소피해·최소비용의 하이테크 전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 제3의 물결 > 로 유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런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는 걸프전 뒤 93년 펴낸 < 전쟁과 반전쟁 > 에서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전쟁은 대량살상무기와 함께 대량학살의 전쟁이었지만, 첨단정보와 지식이 지배하는 21세기는 첨단정보체계에 바탕을 둔 정밀무기체계로 변화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래의 전쟁은 필요한 공격대상만을 정확히 파괴하는 '깨끗한 전쟁'의 양상을 띨 것으로 전망하고,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인류의 지식과 새로운 체계의 무기가 오히려 전쟁을 억지하는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걸프전 이후 만들어진 첨단전쟁과 깨끗한 전쟁이란 '신화'는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의문투성이다. 무엇보다 미군의 융단폭격 뒤 생지옥으로 변한 바그다드의 시뻘건 불기둥과 경보음을 울리며 바삐 오가는 구급차들은 미국이 내세우던 정밀타격 최소파괴무기가 실제로는 무차별 대량파괴무기임을 증명한다.

걸프전 당시 미국이 이라크 군사 목표를 깨끗하게 조준 폭격하던 유명한 장면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이다. 걸프전 때 미군은 22만7822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중 미국이 자랑하는 정밀유도무기는 7.8%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이라크의 주요 시설을 무력화한 것은 재래식 폭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걸프전 때 패트리엇 미사일이 이라크가 쏜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전쟁 뒤 이스라엘 전 국방부 장관 모세 알렌은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은 단 한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맞히지 못해 이스라엘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폭로했다.

미국은 외과수술처럼 아픈 곳만 정확히 도려내는 정밀폭격의 효능을 강조하지만 목표 선정이 잘못될 수 있다. 최첨단 정밀무기의 공격목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정하기 때문이다. 걸프전 때 미국이 이라크 생물학무기 공장으로 알고 폭격한 곳은 분유공장이었고, 군 통신시설로 알고 폭격한 벙커는 민간인 방공호였다. 당시 이라크 정부는 방공호에 대피해 있는 민간인 314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코소보전 때도 명백한 오폭만도 10차례나 벌어져, 1천여 명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99년 코소보전 때는 공격목표를 검토하던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지도 좌표를 잘못 읽어 중국 대사관을 폭격하기도 했다.

미국이 걸프전 이후 첨단무기의 구실을 과장하는 이유는 탈냉전 이후 첨단무기체계에 대한 지속적 투자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냉전이 끝난 뒤 어려움을 겪는 미국 군수업계에 걸프전은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90년 210억 달러 수준이던 미국의 무기수출액은 91년 196억 달러로 줄어들었다가 92년 234억 달러로 급격히 늘어났다. 전 세계 무기수출 시장에서 미국의 비중 또한 90년 42%에서 91년 53%로, 92년엔 60%까지 상승했다. 2003년 이라크전을 맞아 미국은 다시 과학과 첨단무기의 힘으로 세계 평화가 가능하다는 '전쟁과학의 신화'를 강조하고 있다. 기술만능주의 사고에 빠지면 본질적으로 정치외교 영역인 국제관계도 과학기술적이고 군사적인 상상력만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극단에 빠지기 쉽다. 이런 보기는 한밤중에 융단폭격을 퍼부어 500만 명이 사는 바그다드를 불바다로 만들어놓고도 "지금 이라크의 해방을 진행 중"이라고 말하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언어도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13살 여중생 샬롯 앨더브런은 대량파괴와 살상을 최소파괴와 해방이라고 강변하려는 부시와 파월 같은 어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라크 전쟁은 액션영화도 아니고, 공상과학영화도 아니고, 비디오 게임도 아닙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이라크 아이들의 현실입니다.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할 때 여러분은 제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권혁철 기자, < 한겨레21 > 2003년 3월 27일 제4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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