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세상에서 가장 눈물나는 이름 '어머니'

설경. 2008. 5. 20. 13:39

일러스트 권오택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 박경리 '어머니'

‘―세사 어머니를 이렇게 패는 눔이 어딨너// ―돈 내놔, 나가면 될 거 아냐’// 연탄재 아무렇게나 버려진 좁은 골목 담벼락에다/ 아들이 어머니를 자꾸 밀어붙인다// ―차라리 날 잡아먹어라 이눔아// 누가 아들을 떼어내다가 연탄재 위에 쓰러뜨렸는데/ 어머니가 얼른 그 머리를 감싸안았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높다라는 뜻입니다.’  / 이상국 ‘가난하다는 것은’

돈 내놓으라며 어머니를 때리는 아들을 보다 못해 누군가 이 패륜아를 쓰러뜨렸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행여 얻어맞을까 얼른 가로막고 감싸안는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고 가난해도 어머니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다. 유대 금언집 탈무드에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고 했다. 아무도 이 말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무조건 무한정한 사랑은 인간에 기울이는 신의 사랑과 닮았다.

어머니는 삶의 근원이자 안식처다. 그 이름 되뇌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두어 해 전 영국문화원이 영어를 쓰지 않는 102개 나라, 4만여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고르라고 했다. 1위는 단연 ‘Mother(어머니)’였다.

늘 배고픔과 죽음이 곁에 따라다니던 시절, 갖은 비바람 폭풍우를 한 몸으로 다 받아내며 자식들을 키워낸 우리네 어머니들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제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 이 땅의 아들딸들에게 ‘어머니’는 한(恨)과 울음 섞인 아름다움이다. 그 이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젖는다.

‘진주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 엄마// 별빛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박재삼 ‘추억에서 67’

해방 전후해 삼천포 살던 박재삼의 어머니는 생선 장사로 남매를 키웠다. 신새벽 생선을 이고 진주 장터로 나섰다가 달빛 속에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물빛 맑은 남강 풍광 한번 곁눈질 할 겨를도 없었다. 시인은 못 다 판 고기들의 눈빛에서 고달프고 서글펐지만 강인했던 어머니를 추억했다.

‘어머니 몸에선/ 언제나 생선 비린내가 났다/ 등록금 봉투에서도 났다/ 포마드 향내를 풍기는 선생님 책상 위에/ 어머니의 눅눅한 돈이 든 봉투를 올려놓고/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밤늦게 녹초가 된 어머니 곁에 누우면/ 살아서 튀어오르는 싱싱한 갯비린내가/ 우리 육남매/ 홑이불이 되어 덮였다.’   / 이경 ‘어머니’

1960년대 어린 자식은 생선장수 어머니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어머니는 끼니 대기도 힘든 살림에서 용케 자식들 등록금만은 맞춰 주셨다. 자식 공부만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몸에서 났던 생선 비린내는 육남매 평생의 힘이었다.

어머니 억척이 그 시절만 못할 리 없다. 서울 온 어머니가 온몸이 쑤시는데도 기어이 내려가겠다 하신다. 두고 온 밭의 들깨며 무며 배추가 빨리 손봐 달라고 보채기 때문이라신다.

‘암시랑토 않다. 니얼 내려갈란다. 내 몸은 나가 더 잘 안다. 이거는 병이 아녀. 내리오라는 신호제. 암면, 신호여. 왜 나가 요새 어깨가 욱씬욱씬 쑤신다고 잘허제? 고거는 말이여, 마늘눈이 깨어나는 거여. 고놈이 뿌릴 내리고 으면 꼭 고로코롬 못된 짓거리를 헌단다. 온 삭신이 저리고 아픈 것은 참깨, 들깨 짓이여. 고놈들이 온몸을 두들김서 돌아댕기는 것이제. 가심이 뭣이 얹힌 것맹키로 답답헌 것은 무시나 배추가 눌르기 땜시 그려… 이놈들이 한테 모여 거름 달라고 보채는 거여… 나가 여그 있다가 집에 내려가잖냐. 흙냄새만 맡아도 통증이 싹 사라져뿐진다… 어매 편히 모시겠다는 말은 당최 꺼내지도 마라. 너그 어매 죽으라는 소린게로. 알겄제?’   / 정우영 ‘밭’

작년 의왕 화장품 용기공장에서 불이 나 야간 일을 하던 60대 할머니 여섯 분이 참변을 당했다. 쉬는 날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한 달 60만원도 채 못 쥐는 벌이였다. 할머니 대부분은 영세 공장에서 밤늦도록 일해야 할 만큼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 한다. 자식들이 말려도 “짐 되기 싫다” “내 약값 내가 벌겠다” “손주 과외비 벌어보겠다”고 나섰다.

30대 외아들은 어머니가 아들 이름으로 적금통장 들어놓은 것을 알고 통곡했다. 손주 보험을 몰래 들어둔 할머니도 있었다. 거미는 새끼들을 기르다 마지막엔 제 몸까지 기꺼이 새끼의 겨울 양식으로 바친다. 기력 있는 한 자식 생각, 손주 사랑에 궂은일 마다 않은 어머니들이다. 제 몸 태워 바치는 소신공양(?身供養)이 따로 없다.

어머니는 ‘열매/ 다 털리고/ 푸르던 살과 뼈/ 차근차근 내어주고/ …가지마다 저 까만 젖꼭지’(김형오 ‘까치밥’)다. ‘시조부모 시부모살이/ 남편살이/ 여든 다 되시도록 자식들 내외살이까지’ 온갖 것 다 받아낸 ‘창녕 우포늪 연꽃 넓은 멍석잎’(김일태 ‘우포늪’)이다. ‘무덤에 누워서도 자식 걱정에/ 마른 풀이 자라는/ 어머니’(민영 ‘봉숭아꽃’)다.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 정채봉 ‘엄마’

어머니 품 같은 운주사 와불(臥佛), 그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시인은 일찍 잃은 어머니를 불러본다. 늘 불러도 처음 같은 말 엄마. 아무리 나이 들어도 그 이름은 가슴속에서 스스럼없이 나온다.

문단의 큰 별, 박경리 선생이 떠났다. 그 스스로가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수백 문인 예술가들 밥상을 차려주며 뒷바라지 해온 문단의 어머니였다. 그런 선생이 한 달 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 시 ‘어머니’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선생은 사별 30년이 넘도록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 어머니에 대한 불효의 짐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어한다.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로 생을 정리하고 화해하려 한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니께 돌아왔습니다.’   / 조병화 ‘꿈의 귀향’

시인이 자신의 묘비에 새길 글로 지어 뒀다는 시다. 어머니는 육신의 발원, 마음의 고향, 삶의 등불, 안식처이자 귀착지다. 인생은 어머니에게서 시작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인가 보다.

/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아들·딸에 버림받은 노모 경찰서에서도 자식 걱정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오대산 천년의 숲길 생명의 흙 밟으며 탐욕·화·어리석음 3毒을 잊는다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부부란 3개월 사랑하고 3년을 싸우고 30년을 참고 견디는 것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눈물의 ‘밥’이 추억의 별미로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술! 잔을 나누기보다 마음을 나눌 일이다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어떻게 오래 살 것인가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아들과 아버지 사이 그 아득한 행간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비오면 생각나는 부침개 냄새, 어머니 냄새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계절의 바뀜은 매혹적인 기적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보름달처럼 둥근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는 날, 한가위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男子, 그리고 중년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아내의 인내에도 바닥이 있다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참척(慘慽),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고통 자식 잃은 슬픔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없으면 괴롭고 있으면 더 괴로운 요물(妖物) 휴대전화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농촌의 아기 울음소리 뉴스가 되는 세상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세밑, 마음에 박힌 못 뽑으셨습니까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어두운 세월 살라버리고 새 해야, 솟아라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딸이 더 좋아”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설 그 행복한 기다림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시(詩)가 내게로 왔다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꽃 배달 왔습니다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마음이 고플 때는 국수가 먹고 싶다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과속하는 문명의 공포 로드 킬 Road kill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우주를 품은 김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