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종묘와 한양 환도/'엽전 던지기'로 조선의 도읍

설경. 2008. 5. 29. 16:06
'엽전 던지기'로 조선의 도읍지를 정했다고?

1394년 8월. 한양으로 새 도읍 후보지가 결정되고, 두 달여 뒤인 10월 25일에 전격 천도가 이뤄졌다. 종묘가 건축되고, 이듬해 10월에는 경복궁이 완성됐다. 개국 3년이 지나면서 조선은 그럭저럭 나라꼴을 갖추게 됐다.

↑ 서울 종로구 훈정동 종묘(宗廟)

태조가 병석에 누워있던 1398년, 후계자 문제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은 첫 위기를 맞게 된다. 쿠데타의 승부사 이방원은, 둘째 형 방과에게 왕관을 씌웠다. 그가 곧 이름뿐인 군주 정종이다. 그런데 정종 1년(1399년) 2월 12일, 밤중에 뭇 까마귀가 대궐 위에 날아와 울어댔다. 불길한 징조였다. 마음이 편치 않은 정종은, 형제들의 피로 얼룩진 한양을 떠나 개경의 수창궁으로 갔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개경으로 아예 환도(還都)를 하고 말았다.

수창궁 시대가 재개됐다. 그러나 기이한 현상은 계속 됐다. 불길한 짐승들이 궁궐로 뛰어들고, 절에 있는 불상이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더니 1400년 1월 28일에는 넷째 왕자 방간이 방원에 맞서 두 번째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개경은 또 한 번 피로 얼룩졌다. 그리고 친형제끼리 싸워 승리한 방원은, 내친김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이 됐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한 직후인 1400년 12월 22일, 수창궁에 불이 나서 침전과 대전 등이 화마(火魔)에 휩싸였다. 그러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때 하륜은 또다시 풍수지리설을 들먹이며 태종에게 무악으로 가자고 청했다. 그러나 태종은 백성을 수고롭게 할 수 없다며 그 주장을 일축했다. 그 후 한동안 한양 환도 논의는 잠잠해졌다.

그러던 1401년 7월 19일. 태종은 조회를 받기에 비좁다며, 수창궁과 무일전을 고쳐 짓게 했다.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402년 7월 11일, 태종은 하륜, 이무, 김사형 등을 불러 다시 한양 환도 문제를 논하게 한다. 한양과 개경, 그리고 하륜이 주장하는 무악 천도론이 서로 맞섰다. 지루한 논쟁에 피곤해진 신료들은, 그냥 개경에 눌러 앉고 싶어했다. 그러자 태종은, 왕은 개경에 있되 종묘는 한양에 두자는 어정쩡한 절충안을 제시했다. 물론 그것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1403년 1월에는 사헌부에서 종묘와 사직을 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예 개경에 도읍을 정하고, 건덕전 옛 터에 새 궁궐을 조성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태종은 그러자고 했다. 다만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두고, '양경제(兩京制)'로 가자고 했다. 왕이 셋이나 있는 나라니, 도읍이 두 개쯤 돼도 무방하다고 봤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 달도 못 돼 그 결정은 물거품이 됐다. 태상왕, 즉 태조 이성계가 "송도(개경)는 왕씨의 구도(舊都)이니, 그대로 머무를 수 없다"며 한양 환도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해온 것이다. 아무리 냉혹한 태종이라도, 자신에게 숙청당한 아버지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아버지 의견에 따라, 이듬해 겨울까지 한양으로 환도할 것을 공표한다.

하지만 환도 논쟁이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1404년 9월 19일, 하륜이 통산 세 번째 '무악 천도설'을 들고 나왔다. 개경을 떠날 바에야 무악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하륜의 도발적인 제안으로 논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태종은, 측근의 소원 한번 들어주는 셈치고 그해 10월 2일에 권신들과 함께 무악으로 현지답사를 떠난다. 더불어 윤신달, 민중리, 유한우, 이양달, 이양 등에게 한양과 무악의 장단점을 논하게 한다. 10년 전 있었던 무악 천도 논쟁의 '제 2라운드'가 벌어진 것이다.

윤신달과 이양은 무악 쪽에 손을 들었다. 반면 이양달은 무악이 도읍으로서 터가 좁다며 한양에 한 표를 던졌다. 유한우는 무악, 한양 모두 반대하였고, 민중리는 '기권'했다.

결국 이날 논쟁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굳이 다수결 원리에 따르면 무악 쪽의 승리였다. 태종은 "한양은 명당수가 끊어지기 때문에 도읍이 불가하다"며 무악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월 6일 새벽, 태종은 종묘 문밖에서 뜬금없이 이렇게 공표한다.

"…이제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신도(한양)와 무악을 고(告)하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쪽에 도읍을 정하겠다."

그런 다음 태종은 완산군 이천에게 묘당에서 척전(擲錢, 엽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것)을 하게 했다. 그 결과 한양은 '2길(吉)1흉(凶)'이고, 개경과 무악은 '2흉(凶)1길(吉)'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마침내 한양 환도가 결정됐다. 논쟁을 통한 합의가 아니라, 점괘 결과로 말이다. 그것은 '우연에 호소하는 오류'였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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