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없는 선생이었어요. 내 기분으로만 아이들을 대했던
날들이 많았죠.더 잘했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님이 아이들 곁을 떠난다.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 그는 긴 방학을 맞아 학교를 나설 것이다. 방학을 기다리는 설렘보다 아쉬움이 더 큰 것은 그가 정말 지난 40년, 열성을 쏟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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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했던 일인데, 막상 그만둔다고 하니까 마음이 좋지는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제일 맞겠네요. 어떻게 보면 직장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도 있고, 아이들을 떠난다는 아쉬움도 있고요.”
섬진강변 작은 시골 학교에서 새, 꽃, 바람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노래하던 김용택 시인이 분필을 내려놓는다. ‘환갑이 되면 그만둬야겠다’던 평소 생각을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1970년 전북 임실 청웅초등학교 옥석분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이후 38년 만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습관처럼 하루를 보내던 학교를, 삶을 함께하던 아이들을 떠난다는 것이 막막하고 걱정도 되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관문이 아닌가. 직장을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됐다는 해방감에 무게를 두려고 한다.
“사람이라는 것이, 한동안은 터덕거리며 지내겠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고 삶에 젖어들 거예요.”
사실 올해로 환갑인 그는 6·25를 겪는 바람에 신고를 잘못해서 호적 나이가 실제보다 3년이나 늦게 되어 있다. 결국 아직 정년퇴임까지는 5년 반이나 남아 있는 셈. 그런데도 벌써 조기 퇴직을 하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제 할 만큼 했어요. 60이 넘어서까지 직장에 매여 산다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다른 일을 안 하고 선생님만 하고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글도 쓰고 다른 것도 좀 해 보려고요.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글도 쓰고 싶네요.”
중간 중간 근무 규정에 따라 다른 학교에서 1년 근무를 하고는 다시 덕치초등학교에서 5년, 다시 1년 근무, 5년 근무. 그렇게 김용택 시인은 자신의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곳 숙직실에서 ‘섬진강’, ‘참 좋은 당신’ 과 같은 시를 썼고, 아이들과 책을 읽었고, 그렇게 세월을 흘려보냈다. 아이들 곁에 평생 있다가 물러나고 싶다는 바람이 이루어졌으니 별로 미련은 없다.
방황하는 나를 잡아준 것은 문학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모습이지만, 그의 꿈이 원래 선생님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사가 되기 전까지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 농장을 갖겠다는 생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출까지 받아 크게 벌렸던 오리 농장이 망해버렸고, 좌절한 나머지 서울로 올라가 한 달간 ‘낭인’ 생활을 했다. 고생만 진탕 하다가 어느 날 돌아간 고향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교사가 되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당시는 교원이 모자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도 모두 시험 기회를 부여했다. 대신 원서를 써주고, 접수까지 해줬던 친구들과 함께 치룬 시험에서 합격자는 김용택, 그 하나뿐이었고 그는 운명처럼 교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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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교사 생활 초반에는 아이들 마음 많이 아프게 했을 거예요. 어리고 착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하고 매일을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상처를 준 적도 많았겠죠.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아이들이 넓고 너그러워서 상처를 쌓아둔다거나 비뚤어진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방황했던 그를 잡아준 건 다름 아닌 ‘문학’이었다. 학교를 찾아와 방문 판매를 하는 사람에게서 도스토예프스키, 이어령, 괴테, 헤르만 헤세 전집을 샀다.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책을 보니까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던걸요. 내가 살고 있는 학교도 보이고, 우리 농촌도 보이고, 어지러운 사회도 보이고요. 나름대로 가치관이나 세계관 같은 것이 생겨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판단이 서더라고요. 굉장히 아름답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싶고, 그때부터 아이들하고 하루를 지낸다는 게 신나고 재밌어졌어요.”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다양한 고민들,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니 글이 됐다. 그 때부터 김용택은 문학하는 선생님이 됐다.
아이들과 함께했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아이들과 함께 시를 쓰고, 책을 읽고, 공을 차고, 섬진강을 따라 걷던 세월이 흐르면서 7백 명이 넘던 덕치초등학교 아이들은 이제 전교생을 다 불러 모아도 옛날 한 반도 못 만드는 45명이 남았다. 신작로 길을 따라 뙤약볕을 걸어 산으로 갔던 소풍, 온 마을 사람 모두가 와서 뛰고 춤추던 운동회, 수업 시간 반 아이들과 모두 나가 허리를 굽혔던 모내기, 발바닥을 간질이는 섬진강물에 발을 맡기며 자연의 냄새를 맡던 기억은 40여 년의 시간 속에 고스란히 묻혀버렸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던 가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이혼 등의 이유로 뿔뿔이 흩어지고 아이만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로 보내지는 일이 많다는 점. 이곳 덕치초등학교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골 마을에 자리한 학교에는 조손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꽤 많다. 그렇게 상처와 쓰라림을 간직한 아이들은 엄마를 그리며 아빠를 떠올리며 살아간다.
“이 학교에 오래 있다 보니 제자들의 자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왕왕 있습디다. 잘 살아볼 거라고 고향을 떠났으면서 이제 와서 늙으신 부모님만 계신 곳에 돌아와선 제게 ‘또 아이를 맡아달라’고 할 때는 가슴이 참 아팠습니다.”
그렇게 자꾸만 눈에 밟히는 아이들도, 유쾌한 목소리의 천진한 아이들도, 이제는 다 고마운 제자이자 스승으로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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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퇴임을 결정하고 마지막 학기 수업 때 아이들에게 ‘김용택 선생님은 어떤 사람인지’ 글로 써볼 것을 제안했다. 그랬더니 대체적인 반응이 ‘엄하다’, ‘재밌다’, ‘웃기고 신난다’ 세 가지로 나뉘었다.
“나는 내가 굉장히 엄하게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보기에 우스운 면이 많나 봐요. 사실 제가 잘 놀아주기는 해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장난도 많이 치고 같이 공도 차고요. 다행히 환갑 할아버지가 됐는데도 그나마 허옇고 늙수그레하지는 않아서 아이들이 저랑 잘 놀아주네요.”
김용택 시인은 이런 맑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최근 몇 년간 쓴 동시를 묶어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는 동시집을 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우연히 퇴임과 맞물려 책이 나오게 돼서 아이들에게 모두 동시집 한 권씩을 나눠줄 생각이다. 선생님의 진심을 담은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동안 허한 마음을 조금 추스르고 나면 환경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유럽에 가기로 했다. 한 단체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기행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함께해보자고 해서 같이 다녀올 생각이다. 그리고는 좀 편안하게 놀고 싶단다. 어머니 목소리처럼 온화한 섬진강변도 거닐고 시골집에서 누워 뒹굴거리며 앞으로 할 일도 생각해보고 말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할 일이 많다. 일주일에 한 번은 기후변화센터에서 하는 강좌를 들으러 서울에도 가야 하고, 환경 문제에 관한 공부도 하려고 한다. 따뜻한 숨결을 담은 책도 준비 중이다. 아이들 이야기, 오래된 마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인 자신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도 구상하고 있고 시집도 두 권 정도 펴낼 계획이다.
“이제 완전한 문학인으로 돌아가니까 글 쓰는 데 몰두해서 작품을 내야죠. 특히 시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종합해서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것이 시니까 말이죠.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 바로 시를 읽는 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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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을 떠나는 그에게 현장에서 느꼈던 교육 현실에 대한 한마디를 부탁해봤다.
“교육 문제만큼 온 국민이 관심 있어 하고, 잘 아는 분야가 없어요. 국가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만, 학력 위주로 경쟁을 부추기는 현실 앞에서 생각하는 바를 소신껏 실천하기는 어려운 거죠. 뻔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학벌 위주의 경쟁 사회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폭넓은 시야를 가진 아이를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할 때입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아이들의 거울이 될 교사조차 ‘스승’이 되기 위한 노력보다는 그저 하나의 ‘직장인’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대학 진학부터 임용고시 시험까지 바늘구멍을 뚫는 것처럼 치열한 경쟁의 터널을 거쳐 교단에 선 선생님들은 첫 번째 수업에서 만난 아이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먹게 될까. 떠나는 선배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생님’이란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게 되는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이들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는 가장 성실한 학생인 셈이다.
“내 기분만으로 아이들을 대한 적이 참 많았습니다. 참 철없는 선생이었죠. 더 잘했어야 하는데, 다시 새로 시작한다면 정말 열정을 바쳐서 충실하게 하고 싶네요. 다들 떠나는 마음이야 똑같겠지만, 많이 아쉽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교단을 떠나는 ‘철없던 선생님’ 김용택. 한편으로는 학교가 아닌 곳에서 제2의 인생을 꾸려나가게 될 선생님의 모습도 기대가 된다. 섬진강을 닮은 시인은 그냥 그렇게 꾸준히, 조용히 흘러갈 것 같다. 가끔씩 섬진강변의 아기자기한 풍경이나 예쁘게 전해줬으면 좋겠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11530&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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