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라고 말해야만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현대인들은 단 하루도 숫자와 떨어져 살 수가 없다. 특히 요즘처럼 증시와 환율이 요동을 치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국내 증시와 환율의 등락을 주시하는 것도 모자라, 토요일에는 미국의 금요일 주가지수까지 챙겨본다.
학생은 교과목의 점수와 석차에 따라 울고 웃고, 학부모와 교사는 이를 근거로 자녀와 제자를 평가한다. 두뇌능력은 IQ로 수치화하고, 여자 몸매는 '36-24-36' 방식으로 표시한다.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승률, 타율, 안타수, 홈런수 등이 연봉으로 치환된다. 매일 프로야구 구단의 승차와 프로 선수의 성적표를 보며 선수와 팀을 비교 평가하는 것이 야구 마니아들의 무의식적인 습관이다.
이른바 '숫자 중독'이다. 인간 세상의 온갖 것들이 숫자로 표시되다 못해 이제는 꺼꾸로 사람들이 숫자에 매달려 울고 웃는 세상이다.
IT버블 시절 7,000만원을 코스닥에 쏟아부었다가 큰 코 다친 적이 있다. 당시 매일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하루 600만~700만원이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주가가 떨어진 날은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도 어색했다.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자기 때문에 그 주식 사서…." " 누가 그렇게 많이 지르라고 그랬나." 후유증이 2년 이상 지속됐고 기어코 그 회사는 상장폐지됐다. 그놈의 주가 등락 때문에 매일 속을 새카맣게 태운터라 이후 증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요즘 다시 그 숫자놀음이 슬퍼보인다. 주가때문에 가슴에 못박히는 사람들이 애처롭다. 주변에 '텐 프로'들이 속출하고있다. 증시에 투자한 것 중 10%만 남았다는 사람들이다. '반토막'은 행복한 편에 속한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증권시장이 피해자가 속출하는 악성 투기판으로 변했다. 이론상 하루 최대 30%(상ㆍ하한 각 15%)의 변동폭을 가진 증시를 투기판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걸핏하면 하루에 50조원이 증발됐다는 기사가 뜬다.
사설경마장이나 성인오락실은 불법이라며 단속을 벌이는 데, 이보다 훨씬 큰 판인 증권시장은 합법이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적지않은 투자자들이 등락하는 주가지수를 보면서 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데도 말이다.
숫자에 밝지 못하면 과학고나 외국어고는 물론 좋은 대학도 갈 수 없고, 고스톱을 쳐도 승산이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숫자에 탐닉하면 필히 탈이 난다. 하버드 등 미국 명문대 MBA 출신, 심지어 유능한 수학자에 이르기까지 숫자의 귀재들이 월스트리트 중심부에 포진해왔다. 하지만 결국 지구촌의 경제위기에 불을 지른 것도 그들이었다.
조재우 경제부 차장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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