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제발, 그 입 좀 다무시오”
이경형 (언론인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역대 대통령 치고 말 못하는 이가 없다. 그 중에서도 달변을 꼽으라면 단연 DJ(김대중)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두 사람이 다르다면 DJ는 말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반면, 노무현은 설화(舌禍)를 수시로 자초할만큼 오럴 해저드를 연발했다.
다변을 꼽으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일 것이다. 청와대에 사람들을 초청해 거의 강연 수준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다소 어눌해 보이지만, 핵심 단어는 확실히 전달하는 이는 YS(김영삼)이고, 일반 대화도 비서실에서 써준 대로 말하는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이명박(MB) 대통령은 말수가 적을 것 같은데, 예상보다는 얼른 쉽게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대통령도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말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특히 즉석연설을 하거나 환담을 하는 과정에서 언급한 표현 가운데는 거칠거나 적확한 용어가 아닌 경우가 있다.
5년 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등 ‘엽기 발언’을 해 국민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의 화법이 워낙 예측불허여서 주변 참모들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상보다 쉽게 말 많이 해
MB의 화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비해서는 신중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현 경제위기 상황에서 툭 툭 던지는 말의 후폭풍은 ‘엽기 발언’ 못지 않다.
요 며칠 사이에는 이 나라 원로라면 원로라고 할 수 있고, 말 잘하기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전직 대통령들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말들이 연거푸 나와 국민들을 민망하게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최근 해외 순방 중 “환율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지금 주식을 사면, 최소한 1년 내 부자가 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환율’ 발언 한 마디는 곧바로 한국정부가 환율 상승을 용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달러 매물이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주식’ 발언은 같은 자리에서 “내년에는 우리 경제가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우스개로 만들었다.
또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완화 필요’ 발언도 ‘국내 은행들의 건전성이 그 만큼 나쁘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발언이었다.
더욱이 S&P 무디스 등 국제신용기관이 한국 금융기관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면서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떼지 않고 있는 상황이어서 시기적으로도 대단히 부적절한 말이었다.
차라리 안 하느니보다 못한 말 가운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통일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지난달 해외 순방 때)라는 말도 들 수 있다. 대통령이 헌법 4조가 명시한 통일정책 방향을 밝혔을 뿐인데, 무슨 문제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경색을 넘어 초긴장상태로 가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 이같은 말은 상당히 자극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북측은 즉각 “북침전쟁을 최후 목표로 선포한 것”이라고 극구 비난했다.
DJ는 지난 27일 민노당 대표와 만나 MB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면서 “이명박정부가 남북관계를 의도적으로 파탄 내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화해 관계를 처음으로 연 전직 대통령으로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못마땅하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파탄 내려…’는 식의 표현은 누가 들어도 이성적인 원로의 말이 아니라, ‘한(恨)에 사무친 왜곡’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DJ 발언 다음 날, YS는 DJ를 비난하면서 “무엇이 두렵기에 김정일 대변자 노릇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지 국민이 의심한다” “정신이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평생을 정치적 숙적으로 지낸 YS-DJ 관계라고 하지만 너무 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팔순 노인이 되어서도 “정말 못 말린다”는 한탄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노인에게 가장 심한 욕이 ‘노망 들었다’는 것인데, 이런 YS 발언은 시정의 욕설과 진배없다.
국민 민망케하는 전직 대통령
DJ 발언으로 전직 대통령의 품위가 좀 떨어지는가 싶더니 YS의 발언은 품위에 ‘품’자도 꺼내지 못하게 결정타를 먹였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이렇게 삭막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도 YS DJ의 그늘에 묻혀서 정치적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국민들은 ‘10년 전 외환위기보다 더하다’고 아우성이다. 시장을 요동치게 하고 남북관계를 더욱 긴장시키는 현직 대통령의 ‘안 해도 좋은 말’, 전직 대통령들의 칼 끝 같은 독설을 푸는 ‘그 입’을 “제발, 좀 다무시오”라고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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