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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부족 탐사뒤 ‘슬픈 열대’로 세계적 명성
아카데미 프랑스 384년 사상 첫 100세 회원에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사진)가 28일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아카데미 프랑스는 하루 앞서 27일 축하 성명을 발표하면서 아카데미 프랑스 384년 역사상 살아서 100번째 생일을 맞은 회원은 레비스트로스가 처음이라고 밝혔다.
철학에서 인류학까지, 음악 미술에서 요리까지 자신의 다양한 관심을 학문 속에 담아낸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지성사에서 루소 이래 가장 박식한 학자로 꼽힌다.
원시인의 신화적 사고도 서구인의 과학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밝혀 서구 우월주의에 제동을 건 인류학자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축하 물결=프랑스 정부는 28일 원시예술박물관 ‘케 브랑리’에서 레비스트로스관 개관식을 갖고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와 콜로키움(학술 발표회)을 열었다.
케 브랑리는 특히 레비스트로스가 기증한 컬렉션 1478점을 전시했다. 그가 1930년대 브라질 상파울루대 초빙교수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아마존 밀림의 원시부족을 탐사하면서 직접 모은 물건이다. 그는 이때의 탐사 경험을 바탕으로 문명비판서 ‘슬픈 열대’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콜로키움에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이 참여했고 크리스틴 알바넬 문화장관, 발레리 페크레스 고등연구장관 등이 얼굴을 비쳤다.
프랑스와 독일 합작 TV 아르테는 27일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12시간에 걸쳐 레비스트로스를 회고하는 프로그램들을 내보냈다. 1960년대 이래 레비스트로스가 행한 인터뷰 내용을 모아 새로 제작한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설명하는 레비스트로스’ 등을 선보였다.
공영방송 프랑스5는 24일 ‘슬픈 열대’의 주인공인 남비과라족과 5년간 생활한 브라질 인류학자 마르셀루 포르탈레자 플로레스가 지난해 찍은 필름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이 필름에는 포르탈레자가 한 늙은 남비과라족에게 “70년 전 당신들을 만나러 온 백인을 기억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남비과라족 노인은 “물론이다. 그는 우리와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레비스트로스 근황=레비스트로스는 1992년 ‘보기 듣기 읽기’ 출간을 끝으로 사실상 저술 활동을 접었다. 음악광으로 특히 라모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한 그는 파리 저택에서 오페라를 보며 소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서전은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지성사 전문가인 철학자 디디에 에리봉이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까이서 또 멀리서’란 일종의 결산서를 1988년 펴냈다. 이 책은 20년 뒤인 올해 다시 출간됐다.
그는 1981년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20일간 경북 경주시와 통도사 등을 돌아보기도 했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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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한 레비스트로스(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전통 한옥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 한길사 제공
- 작자의 사상적 배경-
Levi Strauss,"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남이 일부 지방에서 인디언들은 백인들을 잡아다가 물 속에 집어 넣고 보초를 세워 그들이 사람처럼 죽고 썩는가를 몇 주간 관찰하게 하였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불사의 신들이 아닌가 하고 의심쩍어 했던 것이다. 반면 백인 정복자들은 인디언을 보고 저들이 사람과는 달리 영혼을 가지지 못한 짐승들이 아닌가 생각했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다 똑같이 서로에 대해 무식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타인을 짐승으로 보기보단 신이 아닌가 하고 의구했던 쪽이 더 인간다운 것이 사실이다.
종족중심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진보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보와 발전의 역사관은 모든 인류의 역사를 종국적으로 하나의 목표로 수렴하게 하는 일직선적인 역사개념과 관계된다. 헤겔의 결정주의 역사철학이나 마르크스의 역사발전의 6단계가 다 이 진보의 맥박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역사 개념을 부정하고, 마치 장기의 말처럼 역사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직선적 역사관에 묻힌 문화상대주의
결국 진보의 역사는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힘주어 열변은 토하듯, 필연의 법칙이 아니고, 우연의 놀이가 축적된 것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축적의 역사>와 <고정의 역사>를 대비시켜 언습하였다. 그는 이른바 문명인이 의미를 부여하고 상호간 선후를 비교하는 역사가 신은 다양한 우연이 축적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편 문명인이 생각하는 발전개념은 개개의 민족, 혹은 종족에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문명인이 사용하는 관계의 좌표는 그들에게 결코 이해되기 쉽지 않은 개념인데, 서양의 시작으로는 고정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는 서양 밖의 문화권 역사를 레비-스트로스는 <고정의 역사>로 명명하였다.
<축적의 역사>라고 명명된 서양 중심의 역사는 모두다 같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마치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끼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듯이 내용은 잘 인지되지만, <고정의역사>라 명명된 변방의 역사는 달리는 방향이 달라 서로 무관하게 보인다. 때문에 문명인들은 그러한 고정된 종족의 역사가 무기력하다고, 심지어는 발전이란 명분으로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다음과 같은 사실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악독한 기후화 지리적 환경에서 살아 남은 적응력에서는 에스키모족이나 베드윈족을 당할 종족이 없고, 철학적이면서 종교적인 사유능력면에서 인도를 누가 따라가겠으며, 자연과 도덕의 조화를 이룩한 문화적 특징을 극동의 아세아제국보다 더 잘 이룩한 나라들이 또어디 있단 말인가? 수경재배에 의한 농작물 생산은 이미 폴리네시아 원주민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수학적 사고역량은 호주의 원주민이 이미 친족체계에서 구체화시켜 놓았다. 모든 문화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가치와 뭍제해결의 능력, 독특한 지식체계를 구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문화는 각각 다양하게 제 나름대로 조제방식이 다를 뿐이다. 조제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하여 배척하려는 것은 착각을 벗어난 오만이다.
Levi Strauss,"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했던 브라질 탐사를 주요 부분으로 하는 기행문이다. 즉, 카두베오족, 보로로 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히브 등의 원주민에 대한 민족지가 이 책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 만은 아니다. 이 책 속에는 '민족학'에 대한 그의 소신, 문명 비판, 그리고 구조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 앞 부분에서 자신이 영향 받은 세 가지 사상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 사상이다. 마르크스에 의해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학처럼 사회과학도 하나의 설명 모델을 만들어 그것이 사실에 비추어 테스트해 봄으로써, 우리의 관찰 결과를 경험적 사실들의 해석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두번째 부류는 프로이드의 이론이다. 프로이드를 통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논리적 모순들은 단지 모순인 것이 아니라 전(全)논리적인 것으로 사실에 대한 가장 정확한 본질을 보여주는 것을 배웠다.
마지막 한 가지는 지질학이다. 그는 지질학을 통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무질서한 풍경 가운데서도 그 풍경의 발달의 역사와 그 풍경을 구성하는 암석들의 내재적 구조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간과 장소는 서로 소통될 수 있는 하나의 공통 언어를 통해 서로 융합될 수 있음을 인식하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탐구란 항상 내적인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딜레마를 두 가지 상이한 인류학적 탐구태도로부터 살펴 볼 수 있다. 첫번째 태도는 인류학자가 그가 속한 사회에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그의 사회의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인류학적 탐구를 하려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결코 다른 사회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그 자신의 사회에서 환멸감을 느꼈던 부분들을 다른 사회 안에서 보게 된다면, 그는 그것에 대하여 그의 사회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의 것인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의 '부족적 편견'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족적 편견하에서 그의 탐구를 마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태도는 반대로, 인류학자가 그가 속한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초탈하여, 순수한 지적 호기심의 지평에서 다른 사회를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인류학자는 그가 속한 사회의 실질 적인 개선에는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편견없는 탐구와 사회의 개선 노력 사이의 딜레마-인류학이 이러한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면 인류학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봉착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회 계약설'에 이르는 루소의 사상사적 여정에서 이상적인 인류학의 모델을 찾는다.
인류학의 이상적인 모델을 살펴봄에 앞서서, 먼저 인류학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인류학이란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으로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인간'을 탐구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사회 '안'에 있으며 사회를 떠난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학은 인간을 탐구하되 인간이 속해 있는 '사회'를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학은 자신의 사회와 다른 사회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 '사회'를 탐구하는 인류학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이상 사회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인류학은 다른 사회들을 탐구함에 있어서 완전한 사회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류학이 하려는 작업은 다른 '사회들'을 통하여, '존재하지 않았고,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어떤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사회는 우리의 사회가 스스로를 개선하여 지향해 가야할 하나의 '범형'이다. 이 범형을 찾는 인류학은 'anthropology'가 아닌 'enthropology'여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한 사회를 '완전 사회'로 파악하고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고찰한 각각의 사회를 분해하여 다시 재조합할 수 있는 요소들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다양한 각각의 사회의 요소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아상적인 '구조'를 이루어 내려는 노력-이것이 바로 인류학의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 노력에는 하나의 사회와 다른 사회는 서로 어떤 우열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열역학적(Themodynamic)' 사회는 미개사회인 '정적 사회(cold or static society)'보다 우월하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사회가 환경에 적응한 생활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사회보다 더 합리적이고 우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열된 우리 사회'보다 원시 사회가 사회문제들에 대한 더 나은 대안들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각각의 사회는 그들 사회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컨데, 카두베오 족의 신체 장식은 자연과 인위적인 것을 구별하고, 인간을 동물과 대칭적인 차원에서 표현하기 위하여, 갖가지 형태의 무늬를 사용하는 회화구도를 지녔다. 그래서 카두베오 족의 예술에서 발견되는 이원주의는 남자의 조각과 여자의 채색 활동이라는 실제적 기능을 통해서, 각에 대한 곡선, 대칭에 대한 비대칭, 선에 대한 면 등으로 이루어져서 전체 구도는 양화와 음화의 조화 가운데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보로로 족의 경우에는 계급적 위계라는 비대칭성이 반족(半族)이란 대칭성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며, 기타 주거지역, 결혼 법칙, 무기나 도구의 장식, 장례의식, 종교생활 등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이원주의가 적용되어 기능적 조화를 이룩한다. 뿐만 아니라 남비콰라족의 경우에는 족장의 직무에 따른 책임과 의무와 이것에 대해서 심리적 위안과 격려를 제공하는 일부다처의 특권은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역할과 권력 사이의 균형관계가 루소가 의미했던 바의 '동의'나 '계약'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집단은 족장에게 일부 다처의 특권을 제공함으로써, 일부일체에 의해서 보증되는 개인적 안전의 요소들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미개 사회들도 그 나름의 합리성에 의해서 조직된 사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회와 다른 사회를 동격에 놓고 비교, 연구함을 통하여 이상적인 사회 모델을 구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각각의 합리성을 이루고 있는 미개 사회들에 우리의 '합리성'을 강요함으로써, 열대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 그리고 그들의 조화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악의 기원은 우리의 문명에 있다. 우리의 문명에 의해서 조화로운 열대는 우리의 눈 앞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열대'는 슬픈 것이다.
....생각보다는 구조 주의 적인 색체가 강하지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들 특유의 암호같은 지적 묘사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려운 철학책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기행문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다면적인 책이다. 해석이 여러 개로 나올 수 있는, 세월이 흐르고 지식이 쌓이면 다시 한번 숙독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Levi Strauss,"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내륙 지방의 네 원주민 부족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에 대한 조사 연구를 행했다. 그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1955년에 저술한 책이 바로 {슬픈 열대}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인류학 관찰 보고서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사상적 편력과 청년기의 체험 등이 일종의 자서전 형태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는 서구 문명의 침략성에 대해 분노를 나타내고 있으며, 자신이 이제는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을 탐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통해한다. 서양 문명이 황폐화시켜버린 열대를 조사하는 인류학자의 비애가 '슬픈 열대'라는 제목을 낳은 셈이다. 그가 비애감을 느낀 것은, 서양의 선교사, 농장주, 식민주의자, 정부관리들이 나름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고 있던 열대 원주민 사회에 침투해 들어와 그들의 정신세계를 상업주의로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서양인들이 문명인임을 자처하며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녀온 이들을 멋대로 야만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낙인찍는 오만에 대해서도 비애감을 느낀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 이른바 미개 사회는 '인간성에 관한 전체적 체험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사회는 우리들의 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이다. 세계의 다른 문화, 다른 지역에 대해 자신들의 가치 기준을 부여하려는 서구 사회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물론 현재의 서구 사회가 기술적으로는 원주민 미개사회보다 우월할지 모른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그것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우열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나무뿌리나 거미 또는 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현대 서구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협성, 서구인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경멸하는 태도, 이런 것은 모두 서구 사회 자체가 부족적인 편견 또는 민족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원시인의 잔인함, 미개성의 징표처럼 간주되어 온 식인풍습도 레비-스트로스는 '조상의 몸의 일부나 적의 주검의 살점을 먹음으로써 죽은 자의 덕을 얻으려 하거나 그 힘들을 중화시키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변호한다. 그리고 '식인풍습이 죽음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해부학 실습을 허용하는 일도 같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두 가지 유형으로 사회를 나누어 설명한다.
즉 식인풍습을 행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중화시키거나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자기네 육체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현대 서구 사회의 경우에는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그들은 정반대의 해결책을 택한다. 무섭고 끔찍한 존재들을 일정 기간 또는 영원히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감옥, 병원 등의 시설 가운데에서 인간성과의 모든 접촉을 거부당한다. 우리가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러한 우리의 관습은 극심한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 결국 우리와는 상반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간주하듯이, 우리들 자신도 그들에게는 야만적으로 보여지게 된다.
<슬픈 열대>는 인류학 조사 보고서로서보다는 위와 같은 레비-스트로스의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인류학 더 나아가 사회과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라는 다른 저서에서도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과학적 사고와 미개 사회에서 우세한 주술적, 신화적 사고 사이에 커다란 간격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후자, 즉 야생의 사고를 인간의 본래적이고 보편적인 사고 형태로 간주했다.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작업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 타문화에 대한 서구 문명의 편협한 시각과 오만을 비판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사실 서구인들만이 편협한 시각을 지닌 것은 아니다. 이른바 자민족 중심주의 또는 자민족 우월주의(ethnocentrism)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 속에 자리잡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멸시와 천대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미개사회에 대한 견해는 종종 미개사회, 원시사회를 지나치게 이상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구조조의 인류학 역시 변화의 측면을 간과하고 지속, 원형, 구조의 측면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어떤 원형적인 것, 사회계약 상태 이전의 순수 자연 상태의 인간을 찾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고백한 적도 있다. 그런 열망을 감안한다면, 백인들에 의해 이미 오염된 브라질 내륙 원주민 사회와 만난 그가 얼마나 큰 실망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chungdong.or.kr/highroom/timas/%EB%8F%85%EC%84%9C%EC%9E%90%EB%A3%8C/%EC%8A%AC%ED%94%88%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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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권장도서백권] 슬픈열대-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해설
서구의 반대편에 떨어진 신세계인 남미에는 문명이 건설한 도시와 사라져가는 운명에 놓인 원주민들이 함께 있다.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탐험의 회상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이 지역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분석하면서 ‘문명’과 ‘미개’의 관계를 규명하고 그로부터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는 이 지구상에 가장 원시적인 따라서 가장 자연적인 상태의 삶을 살고 있는 네 개의 미개인 부족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심성과 사고방식, 사회조직과 생활양식, 종교와 의례, 예술과 상징 등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그들이 본질적으로는 문명인과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서구의 합리성을 넘어선 더 넓은 ‘의미의 범주’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과 원시 그리고 순수한 인간의 세계를 급격히 황폐화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진 서구의 탐욕이 아름다운 도시 속에 썩은 냄새를 풍기며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는 서구의 ‘문명’과 비서구의 ‘미개’를 별개의 것으로 논하던 종래의 습관을 벗어나서 이 둘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는 탁월한 시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문명과 미개가 모두 서구인의 욕망이 발명한 상상의 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는 ‘신세계’의 순수한 자연이란 허상에 불과하며 ‘미개’를 발명하고 정복하며 마침내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문명의 폭력과 욕망이 자행한 역사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실은 서구인들이 자신을 발명하고 왜곡하며 타락시키는 현실이라는 통찰에서 오는 통렬한 아픔과 분노를 맛본다. 그의 슬픔은 순수한 인간이 급격히 멸종되어 간다는 사실과, 서구인 스스로가 상상으로 발명한 허구적인 자신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현실과, 뻔뻔스러운 문명과 내버려진 미개의 틈새에 서서 이를 증언해야 하는 인류학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간파하는 중층적인 슬픔인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문명과 야만을 하나의 체계 속에 놓고 끊임없이 양자를 오가며 심층적이고 넓은 안목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익숙한 자기의 세계로부터 낯선 ‘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유일한 진리로서 굳게 믿고 있는 자기 문화의 껍질을 하나씩 벗어나가 마침내 저 심층 한가운데에 가려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는 구도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의 인류학자가 추구하는 과학적 탐구의 긴 여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명과 미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도를 설정하고 사라지는 미개에 대한 싸구려 감상을 연출하는 통속적인 여행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 서구가 축적한 정교한 지식의 면밀한 분석을 동반한 진지한 참회록이다. 결국 ‘그들’과 ‘나’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성찰로부터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지구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가진 성숙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인식의 틀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선배와 동료들이 남긴 다른 세계에 대한 다양한 형식의 지적 모험의 기록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으며, 성숙한 눈으로 지식의 거대한 신세계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이 현대인의 저작이 고전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지식생산의 역사적 과정을 규명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상보기와 자기 발견의 시도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출처 : [기타] 김광억 서울대 교수·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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