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시크릿’에 없는 비밀 / 김형경

설경. 2008. 12. 19. 17:56

[한겨레] 세상읽기

한 후배 여성이 남성 조건 열 가지를 정하고 그와 같은 생의 동반자를 얻고자 기원했다고 한다. 삶의 지향점이 같은, 가치관이 비슷한, 관대한 성격의, 가부장적이지 않은 등등. 몇 달 후 자신의 조건에 딱 맞는 남성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조건, 싱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빠뜨려서 그 아까운 사람이 유부남이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웃자고 드리는 말씀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 독서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시크릿>이라 알고 있다. 그 책은 생에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비밀을 단순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저 후배 여성이 한 것처럼 원하는 것을 구하고, 그것이 성취된다고 믿고, 감사하게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 책의 판매량만큼 사석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일단 믿고 실천해 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세상일이 구하고, 믿고, 받으면 되는 단순한 원칙으로 이루어지느냐, 누군가에게 무조건 달라고 하는 태도에 깃든 탐욕과 의존성은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니냐 등등. 개인적으로 나는 그 책에 대한 관심을 삶의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열망이라 이해했다.

동양에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시크릿’과 같은 삶의 지혜들이 있었다. 전통과 단절되면서 함께 잃어버린 그런 지혜들로는 ‘요범사훈’과 ‘원효스님 수행법’을 들 수 있다. ‘요범사훈’은 요범 선생이 운명을 뛰어넘어 삶을 자율적으로 운용해 온 방법과 지혜를 자식에게 남긴 기록이다.(정공법사 강설, 이기화 번역 <운명을 바꾸는 법>으로 출판되어 있다) 네 가지 가르침은 운명을 세우기, 과오를 참회하기, 선행하기, 겸손한 덕을 유지하기다. 원효스님 수행법도 네 가지인데 참회, 권청, 수희, 회향이다.

요범사훈과 원효스님 수행법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잘못을 뉘우치고 허물을 고치고, 선행을 하고 타인의 선행을 함께 기뻐하며, 자신의 성취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크릿>의 저자는 기독교 문화권 인물이라 짐작된다. 책에는 씌어 있지 않지만 그에게 회개와 헌금은 당연한 일상이어서 책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하기 전에 회개하고 받은 다음 회향하기. 그것은 마술이나 비결이 아니라, 다급하고 경쟁적인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오래된 원칙과 지혜일 것이다.

수상한 시절에 어수선한 연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선행, 기부, 나눔의 문화가 넓게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본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 기부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는 성장기에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본격적인 사회 동력으로 기능하면서부터라고 짐작된다. 젊은 세대 중에는 개인적 욕구 충족보다 선행과 기부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그런 이들의 낯빛이 내면에서 우러나는 충만감으로 인해 유난히 빛나고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반면 유년기에 가난을 경험한 세대, 가난을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경험했던 이들은 돈을 내놓는 일을 아주 어려워한다. 지나치게 인색하게 굴다가 황혼 이혼을 당하고도 “돈이 많아서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돈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오명뿐 아니라 감옥에서 한두 해 썩는 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명예나 가족보다 돈이 있어야 생존이 안전하다고 믿는다. 50년도 더 지난 트라우마에 발목이 잡혀, 필요한 것보다 많은 돈을 소유하고도, 그들의 낯빛이 불안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모습은 가슴 아프다.

김형경 소설가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